한 판 메이헤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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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메이헤런이 이런 방식을 완전히 익히는데는 4년이 걸렸으며, 그는 자신이 만든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이 꽤 잘 만들어진 위작이며, 그 자체로도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판 메이헤런은 이 그림을 브레디위스 박사에게 보였으며, 예상대로 그는 이 작품이 페르메이르의 진품이라고 감정했다. 네덜란드 예술 협회도 마찬가지로 속아 넘어갔으며,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그 그림을 사들였다. 판 메이헤런의 원래 목적은 예술 비평가들을 골탕먹이는 것이었지만, 짭잘한 수익을 거두게 되자 돈벌이로 위작을 만들게 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여섯개의 페르메이르 위작을 더 만들었으며, [[프란스 할스]]와 [[피터르 더 호흐]]의 위작도 만들었다. 특히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과 이후 나치 점령으로 인해서 사회가 어수선했기 때문에, 아무도 판 메이헤런이 만들어내는 많은 가짜 그림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나치 점령기에도 미술품 거래는 이루어졌다. 1942년에 그린 판 메이헤런의 위작은 160만 [[휠던]]에 팔렸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 가격이었다. 판 메이헤런이 그린 가짜 페르메이르 그림은 《간음한 여인과 함께같이 있는 그리스도(Christ Withwith Thethe Adultress)》이었는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헤르만 괴링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 그림이 훗날 연합군에 의해 발견되고, 이 그림 때문에 판 메이헤런이 체포된 것이다. 한편, 괴링이 지불한 금액은 모두 위조지폐였다고 한다.
 
판 메이헤런이 그 그림은 진짜 페르메이르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가짜라고 하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판 메이헤런이 직접 위작을 만들어 보여야 그의 주장을 믿을 수 있다고 했고, 판 메이헤런은 이에 선뜻 응했다. 판 메이헤런은 3개월간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그 기간동안 경찰의 감시하에 직접 《신전에서 설교하는 젊은 예수(Young Jesus Preachingpreaching Inin Thethe Temple)》이라는 마지막 위작을 만들었다. 이 사건은 전세계 언론 매체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판 메이허런은 네덜란드의 수상에 이어서 두 번째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재판은 [[1947년]] [[8월 29일]]에 열렸다. 당시 판 메이허런은 58세였으며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으며, 자신이 위조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술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을 우려하여 그가 위작으로 만든 그림을 심사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위작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꾸려졌다. 조사 결과 페르메이르 시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코발트 블루]]가 위작에서 발견되었고, 이것으로 판 메이헤런의 그림은 모두 위작임이 증명되었다. 판 메이헤런은 나치에게 국보급 미술품을 팔아넘긴 매국노가 아니라, 나치까지 속여넘긴 사기꾼이 된 셈이었다. 그는 미술품 위조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태가 안 좋아서 감옥 대신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1947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