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바깥 고리 → 외부 링크) |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앱 |
||
47번째 줄:
가야의 멸망에서 [[대가야]]에 이르기까지 가락국은 소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대가야의 후기에 들어서 대가야가 백제와 신라라는 양대 강국사이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가락국은 자주권을 잃고 신라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직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차지하면서 극성하던 [[496년]]에 가락국은 신라에 화친의 표시로 "흰 꿩"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신속의 의미였다. 대가야의 다른 지역에서 고총(高塚)이라는 대규모 고분이 조성되고 있을 때 가락국은 그런 규모의 고분 조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음이 확인될 정도로 가락국은 완전히 쇠퇴해 있었던 것이다. [[529년]] 신라장군 [[이사부]]는 가락국의 [[다대동|다다라]](多多羅)를 기지로 삼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임나일본부|안라왜신관]]에 소속되어 [[안라국]]의 명령으로 가락국의 자주독립을 지원하고 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일본군을 웅천(熊川)에서 공격한데 이어서 [[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남가야는 산라와 백제 양쪽으로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532년 가락국왕인 [[구형왕]]은 결국 신라에 나라를 바쳐 투항함으로써<ref>《[[삼국사기]]》 〈[[:s:삼국사기/권34|권34]]〉 至十世仇亥王, 以梁中大通四年, 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10세(世) 구해왕에 이르러, 양 [[중대통]](남조 양(梁)의 무제(武帝)의 연호(529~534)이다.) 4년(신라 법흥왕 19년, 532년)에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ref> 가락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구형왕과 그 후손들은 구 가락국의 영역을 발판삼아 진골로 편입되어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고 이는 나중에 [[김유신]] 등의 후손들이 신라의 정계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락국의 왕손들은 이후 신라황실의 성(姓)인 김씨에 대해 신김씨라 불리며 명목상 진골에 편입되었지만 한동안은 신라의 상류사회로부터 차별이 있을수 있었다고 본다.하지만 삼국사기나 사서에 그런 증거는 없다.이런 신김씨의 위상이 높아졌던 것은 [[김유신]]이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제휴하면서부터로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 노력하는 한편 삼국통일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웠다. 그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에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왕이 되었다.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은 당나라의 발해침공시와 때를 같이하여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신김씨의
==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