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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그런데 인종이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여 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니 형세는 역전하였다. 이번에는 소윤 [[윤원형]]이 득세하여 전일(前日)의 윤임 일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있던 윤원형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평소 대윤파와 사감(私感)이 있던 지중추부사 [[정순명]](鄭順明), 병조판서 [[이기 (1476년)|이기]],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 심복들과 더불어 계책을 꾸몄다. 또 한편으로 그의 첩 [[정난정]]으로 하여금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케 하여 형조판서 [[윤임]] 및 그 일파인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좌의정 [[유관류관 (1484년조선) |유관]](柳灌) 등을 반역 음모죄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서 [[계림군]](桂林君)도 이 음모에 관련하였다는 무고로 죽이고, 전직 주서(注書) [[이덕응 (조선 사람)|이덕응]](李德應)을 협박, 그 무고로서 수찬(修撰) [[이휘]](李輝), 부제학 [[나숙]](羅淑), 참봉 [[나식]](羅湜), [[정희등]](鄭希登)과 [[박광우]](朴光佑), 사간(司諫) [[곽순 (조선사람)|곽순]](郭詢), 정랑(正郞) [[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 10여 명을 죽였으며, 그 뒤 [[이덕응 (조선 사람)|이덕응]] 도 화를 입었다. 또 명종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봉성군과 계림군은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한편 사화의 여파는 그 후 6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