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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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과 원인 ==
북벌을 단행하려고 [[소련]]과 연대했던 쑨원은 1923년부터 소련과 중국공산당원을 전략상 포용하는 방책을 마련하고 소련에 도움받아 [[모스크바]]와 [[광저우]]에 손일선대학과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북벌을 위한 무관과 혁명 지도자를 육성하였으며 [[베이징]]을 포함한 북부 지방에 대해 북벌을 준비하였다. 1925년 쑨원의 사후, 중국국민당은 [[왕징웨이]]가 임시 당수에 오르고 [[장제스]]가 군권을 쥐는 체제로 조직이 짜여지는 중에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기류가 당 내부로 흘러들었고 당내 갈등이 빚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소련은 [[레닌]] 사후로,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중국에 친공 정권을 수립하려는 혁명 전략을 짜고 경쟁하였는데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에 지시받아 국공합작을 발판으로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에 기초한
== 결과 ==
중국국민당은 [[코민테른]]을 등에 업은 파업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장 해산시키고 중국공산당원과 좌파를 당내에서 강제로 축출한 후 중국에 대한 북벌을 완수한 뒤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고 장제스도 당내 권력을 장악하고 다시 권력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국내외 위급한 정세로 인해 중앙집권식 통치를 표방하면서 마찬가지로 민주 공화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중국국민당은 북벌 후로 국가 혼란을 나름 수습해 나가는 한편 [[소련]]과 단교했고 [[중화민국]] 북양 정부를 지원했던 서방의 시장경제 세력과 화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본주의경제를 표방하였다. 그런데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일본 제국]] 등이 중국에서 이권을 얻고자 하였으므로, 중국은 안정 속의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1927년]] [[7월 13일]], 중국공산당은 대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제1차 국공 합작]]의 종료를 선언하고 이후 같은 해 [[8월 1일]] [[난창 봉기]]를 비롯하여 수차례 봉기하면서 정권에 대한 무력 도전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도시지역에서 무장혁명 입지가 줄어든 후는 지하로 숨어들어 혁명을 계속 벌여 나아갔다. [[마오쩌둥]]을 위시한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체 무장혁명을 통해 정권을 노리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홍군]]을 조직해 농촌 지역과 산간 오지로 잠입하여 소비에트를 설치하면서 세력을 도모해 갔고 사회 각계의 친공 수행원들과 비밀 당원들은 중국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지하운동을 하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끄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간 모두 정권을 쥐고자
중국국민당 좌파에서 [[쑹칭링]]을 비롯한 친공파 세력은 장제스에 공식으로 반기를 들고 중국공산당의 혁명 노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틀면서 세력을 규합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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