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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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infobox bordered" style="align: right; width: 30em; font-size: 90%; text-align: left; float: right;" cellpadding="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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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6 bgcolor="#FFCCAA" style="font-size: 120%; text-align: center;" | '''원삼국'''<br />'''原三國'''/'''열국列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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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부여]] || [[고구려]] || [[옥저]] || [[동예]] ||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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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span=6 align="center"|[[파일:History of Korea-001 ko.png|280px|b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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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span=6 align="center"|[[1세기]] 경, 원삼국열국 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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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 시대'''(原三國時代)또는 '''열국 시대'''(列國時代)는 [[서력기원|기원]] 전후로부터 [[2세기|기원후 2세기]] 중반까지의 초기 [[철기 시대]] 이후를 말하며,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이 멸망 또는 쇠퇴하고 [[부여]]가 건국되는 시기부터 [[삼국 시대|삼국이 건립]]된 이후의 [[2세기]]에서 [[3세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ref>
국사교재연구회 편, 《한국사개설》, 학문사, 2000년.</ref> 한반도에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600년을 원삼국이라열국이라 부르기도 한다.<ref name="korhist">
{{서적 인용
|저자=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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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관 ==
[[한사군|한의 군현]](郡縣)이고조선이 쇠퇴함에 따라 토착 사회의 여러 부족 국가는 통합의 추세를 보였다. 이런 형세 속에서 고대 국가로 등장하게 된 것이 이른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었다. 그 당시 삼국은 각기 대륙의 [[남북조 시대|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문화를 수용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 체제를 갖추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철기 문화를 재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삼국은 고대 국가적 체제를 갖출 때 동일한 세기 계층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약 2세기, 고구려와 신라와는 약 3세기, 신라와 백제와의 사이에는 약 1세기 정도의 연차(年差)가 있었다. 이러한 연차는 곧 삼국이 부족 국가로 남아 있던 세년(歲年)의 길고 짧음을 비교케 하는 동시에 삼국 사회 발전의 지속상(持續相)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국사}}
[[부여]] 계열의 일파로 고(故) 현도에서일파에서 일어난 [[고구려]]는 원래 주위에 많은 강적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과의 싸움 속에서 초기 부족 연맹을 형성하여 갔다. 6대 태조왕 때에는 부족 연맹 세력의 영도권이 확립되어 고대 국가 성립을 위한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의 대외 관계는 중국과 새외(塞外)의 관계가 병행하고 있어서 문화상으로나 정치·경제상으로 중국 일변도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이리하여 삼국 중 고구려는 대(對)한족 투쟁 세력으로서 먼저 대두하여 북방에서 충분히 자립성을 가지면서 고대 국가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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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계에서 원초 삼국시대와 원사시대(Protohistory,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중간)를 합해 규정한 용어가 '''원삼국 시대'''이다. 이 용어에는 우리 역사에서 이 시기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담겨 있고, 삼국시대 초기(1세기~3세기)를 부정하는 뜻이 된다.<ref name="korhist"/> 한편 명칭을 두고 고고학적으로 원삼국 시대에 나타나는 특징이 없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었으나, 원삼국 시대라는 용어가 관행적으로 굳어져 용어가 하나로 통일되지는 않는다. '''열국 시대''' 또는 '''삼한 시대'''로도 불린다.<ref>〈[http://mnum.mokpo.ac.kr/yoonbo/07_1.asp 철기시대의 설정과 문제점]〉, 최성락, 목포대학교 박물관, 1998년.</ref>
 
[[윤내현]]은 이 시기를 고조선의 제후국들이 독립하게 되어 작은 국가로 나뉘게 된다는 의미로 ‘열국 시대’로 지칭하고 있다. 그의 저술에 따르면 [[후조선]]의 왕 [[준왕|기준]]은 위만에게 왕권을 찬탈 당하여 바다를 건너 [[마한]]을 건국하며 고조선은 위만조선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한의 속국으로 [[진한]]과 [[변한]]이 건국되며, [[규원사화]]에서는 이 세력을 변진으로 부르며 고시(高矢) 씨의 후예로 본다고 주장한다. 작은 부족국가로 [[동예]]와 [[옥저]] 등이 건국되었다고 하며, 요서에 자리잡고 있던 고조선의 제후국인 [[숙신]](肅愼), [[예 (민족)|예]](濊), 옥저(沃沮) 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숙신은 [[아무르 강|흑룡강]] 부근에 위치하게 되고 [[읍루]]라 불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는 [[강원도]]에 정착하여 동예(東濊)라고 불리며, 옥저도 [[함경도]] 부근으로 이동하여 동옥저(東沃沮)라 불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대릉하]]에 자리잡고 있던 [[낙랑]]과 [[대방]]의 세력은 [[청천강]]과 [[대동강]]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ref>윤내현, 《한국 열국사 연구》, 1999년.</ref> 윤내현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자의적인 사료 해석과 근거 부족을 이유로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다.<ref>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ref>
 
== 같이 보기 ==
*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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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 [[고조선]] <br /> [[진국]]
| 후 = [[삼국 시대]]
| 현재문서 = 원삼국열국 시대
| 시작 = [[기원전 300년]]
| 종료 = [[3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