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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년]] 한글학자 [[권덕규]]가 쓰고 광문사(廣文社)에서 출판한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우선 《왜사기》라는 문헌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헌을 가리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비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인데, 신경준의 《여암전서》 〈책차제〉(策車制)에 따르면 비차를 만든 사람은 김제 사람인 [[정평구]](鄭平九)라는 인물로, 왜병에게 포위된 영남의 어느 읍성을 지키던 성주의 친한 지인이 이 비차를 만들어서 성 안으로 들어가, 친구를 태우고 30리 바깥으로 날아가서 지상에 착륙해 왜적의 칼날을 피하게 했다고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는 인조 때의 사람인 [[전주|전주부(全州府)]] 출신의 김시양(金時讓)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이라며, "[[충청도|호서]](湖西)의 노성(魯城) 지방에 사는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윤증|명재]](明齋)의 후손이다. 이 사람이 정밀하고 교묘한 기구를 만드는 재간이 있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하여 두었다."고 했다.
 
== 연구 및 해설 ==
비거를 만들었다는 정평구라는[[정평구]]라는 인물은 일단 그의 무덤이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부양면 제월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이며, [[1566년]] 3월 3일에 태어나 [[1624년]] 9월에 59세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는 문관에 뜻을 두고 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한 뒤 무관 말단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 전라우수사 [[이억기]]에 의해 진주병영의 별군관(別軍官)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김시민]]의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비거의 형태와 구조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에 의하면, 비거의 비행 원리는 먼저 동체에 있는 가죽주머니 아래쪽에 뚫려있는 구멍을 열어 압축 공기를 아래로 분출시키면서 그에 따른 반작용과 함께 공기 방석작용으로 이륙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비거에 탄 네 명이 날개를 움직이는 줄과 연결된 기계장치를 움직여 양쪽 날개를 상하로 움직임으로써 비거는 지면에서 떠오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비거는 공중에서 약 100장(200m) 정도까지 비행할 수 있었으며, 상승기류를 타면 30리라도 날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