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 (조나라 사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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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이세황제]] 3년([[207년]]) 10월, 장초와 6국의 부흥군을 가는 곳마다 무찌른 진나라 장수 [[장한]]이 이량의 투항을 받아 한단성을 접수하고 한단의 주민들을 하내로 이주시켰으며 성을 파괴했다. 이세황제 2년([[기원전 208년]]) 9월(진나라 달력에 따른 것으로 한단성이 파괴되기 한 달 전)에 이미 장이는 조왕 헐과 함께 거록으로 달아났고, 거록성은 장한의 부장 [[왕리]]에게 포위되었다. 한편 진여는 항산에서 병사 수만을 모아 거록의 북쪽에 주둔하고, 장한은 극원에 있으면서 용도를 쌓아 왕리에게 군자를 공급했다. 왕리는 식량이 넉넉해 급히 공격했고, 거록성 안에는 식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장이는 진여에게 여러 차례 거록으로 오라고 했으나 진여는 군사가 적어서 감히 진나라에 도전하지 못했다. 여러 달이 지나자, 장이는 진여를 원망해 수하 장염(張黶)과 진석(陳澤)<ref>《사기정의》에 따르면, 陳澤의 澤은 釋으로 읽어야 한다.</ref>을 보내 같이 죽기로 했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돕지 않는 것을 꾸짖었다. 진여는 승산이 전혀 없고 같이 죽을 뿐이라고 말렸으나, 장염과 진석이 시세가 급하다며 한사코 청하자 군사 5천을 주어 싸우게 했고, 이들은 모두 죽었다.<ref name="s89"/>
 
연나라에서는 조나라의 위급을 듣고 이세황제 3년 10월에 [[장도 (연왕)|장도]]가 이끄는 구원군을 보냈고,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은 사실 조나라와 사이가 나빠 구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었으나 전영의 장수 [[전도 (제왕)|전도]]가 전영의 뜻에 반기를 들고 조나라를 구원하러 출진했으며, 장이의 아들 [[장오]]도 대군에서 1만여 군사를 모았으나, 이들은 진나라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초나라에서는 이미 이세황제 2년 9월에 [[송의]]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으나, 송의는 사실 조나라를 힘써 구원할 생각이 없었고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우다 양측이 다 피곤해질 때 한 번에 무찌를 생각이었는데, 군권을 빼앗긴 [[항우]]가 이에 불만을 품고 송의를 쳐죽이고 적극적으로 조나라를 구원하러 움직였다. 먼저 [[영포]] 등의 선발대로 용도를 여러 차례 공격해 왕리 군의 식량을 핍절케 하고, 마침내 자신도 강을 건너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를 본 제후군도 가담해 진나라 군대를 무찌르니, 12월에 거록의 포위가 그제야 풀렸다.<ref name="s89"/><ref name="s16">위와 같음, 권16 진초지제월표제4 {{위키문헌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16|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ref>
 
[[장이]]가 [[조헐|조왕 헐]]과 함께 구원군에게 사례하러 나왔다가, 자신을 보고 분노해 장염과 진석의 행방을 물었다. 이에 화를 내며, 자신이 5천 병사를 주어 진나라와 싸우다 죽었다고 말했으나 장이는 진여가 죽였을까 의심해 거듭해서 물었다. 결국 분김에 장군의 인수를 장이에게 던지고 측간으로 갔는데, 놀라서 차마 인수를 받지 못하던 장이에게 그 식객이 진여의 인수를 아주 가지라고 권했고, 장이는 이를 따라 진여의 휘하를 모두 거두었다. 진여가 돌아와서는 장이가 인수를 돌려주지 않자 자기 휘하에 남기를 원한 수백 명과 함께 하상택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으며 지냈다. 둘 사이는 이렇게 깨졌다. 이세황제 3년 1월의 일이었다.<ref name="s89"/><ref name="s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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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각주}}
<references/>
 
{{항우의 열여덟 제후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