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우르바노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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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1362년 9월 12일 선종했다. 그의 후임자를 뽑기 위한 콘클라베는 성 마우리시오 축일인 9월 22일 아비뇽 교황궁에 소집되었다. 21명의 추기경들 가운데 이탈리아에 그대로 머문 알보르노스 추기경을 제외한 20명이 참석하였다. 20명의 추기경들 가운데 18명은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6명은 리무쟁 출신이었다. 21명의 추기경들 가운데 10명은 전임 교황과 친족 관계였다. 그렇지만 당시 리모주 추기경들의 영향력은 다소 퇴색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향이 당시 잉글랜드에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프랑스 침공으로 발발한 [[백년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프랑스 왕의 신하였던 13명의 추기경들은 공포심을 느꼈다.<ref>J. P. Adams, [http://www.csun.edu/~hcfll004/SV1362.html ''Sede Vacante 1362''.] 확인: 2016-06-12.</ref> 엘리 드 탈레랑 추기경과 기 드 불로뉴 추기경 둘 다 자신이 교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 마테오 빌라니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5명의 추기경이 리모주 출신이며 교황 클레멘스 6세의 동생인 교황 궁무처장 위그 로제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정작 당사자인 위그 추기경이 교황직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오직 빌라니의 기록 뿐이다. 더욱이 이 이야기는 추기경단이 탈레랑 추기경을 지지하는 세력과 불로뉴 추기경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교착 상태가 이어지면서 어느 한쪽도 3분의 2 이상 득표하지 못했다는 장 드 프루아사르의 기록<ref>''Chroniques'', Premier Livre, § 500; Volume II, p. 78-79 ed. Luce.</ref>과 상반되는 것이다. 9월 28일 추기경들은 합의를 보지 못하자 제3의 인물로 그리모아르를 선정하여 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ref>Chaillan, the biographer of Urban V, pp. 22-23.</ref> 그리모아르는 당초에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추기경들과 의논할 일이 있으니 속히 아비뇽으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추기경들은 또다시 프랑스 사람이 교황이 된 것에 대해 로마 시민들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일까 봐 염려하여 한달 후인 10월 말에 그리모아르가 아비뇽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선출 소식을 비밀에 부쳤다. 그들은 로마 시민들이 콘클라베가 실시되기 전부터 로마 사람이나 최소한 이탈리아 사람이 교황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 섞인 이야기를 자주 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모아르의 선출을 알게 된다면 그가 아비뇽에 오는 것을 방해할 것을 우려하였다.<ref>이 주장은 그리모아르가 로마에 있다는 전제하에 하는 이야기다. 이 주장은 이탈리아의 다른 주들 역시 이탈리아 사람이 교횡이 되기를 바랐을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ref> 그리모아르는 아비뇽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선출을 받아들이고 우르바노 5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우르바노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 이름을 가진 교황들은 모두 성인들이었다”고 말했다답변했다.
 
그리모아르는 교황 선출 당시 주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교황 즉위식에 앞서 주교품을 받아야 했다. 그의 주교 서품식은 11월 6일 전임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조카인 오스티아 교구장 [[아두앙 오베르]] 추기경이 집전하였다.<ref>Richard P. McBrien, ''Lives of the Popes'', 243.</ref> 오스티아의 교구장은 전통적으로 교황 선출자의 주교 서품식을 집전할 권리가 있었다. 주교품을 받자마자 우르바노 5세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교황의 머리에 삼중관을 씌운 성직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부제급 추기경 단장이자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조카인 기욤 드 라 쥘 추기경이 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유수의 여섯 번째 교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