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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 ~ [[1971년]] [[3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자는 천여(天汝), 본관은 [[진주 유씨|진주]]이다. 한국사람들의 [[보건]]을 해결하기 위해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정직한 기업활동을 했다.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유언으로 남겼으며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가 있다.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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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다. 이를 안 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냈지, 운동부에서 활동하라고 보낸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 [[대학교]]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공부를 못합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였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 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에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우리교육에서 출판한 유일한 전기에 따르면, 청년시절에 유일한은 [[중국계 미국인]]들에게 [[부채]], [[찻잔]]같은 [[중국]]의 전통제품들을 파는 일을 했다. 중국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일하여 돈을 벌되 검소하게 [[생활]]하지만,[[고향]]을 그리워하여 전통제품은 산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장사를 한 셈이다.
 
=== 식품사업가 시절 ===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학)|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중매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 유한양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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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02245.html 한겨레 2007년 4월 11일자, 한국기독교 120년-숨은 영성가를 찾아 ⑪ 유일한 선생]</ref> 1936년 유한양행은 한국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였다.
 
이후 회사의 운영을 동생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유한양행의 사업 조직망 전체를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에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ref>{{웹 인용|제목=광복 60년, 재계 친일청산은 끝났는가?|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93&aid=0000001753|웹사이트=네이버}}</ref>, 해방 후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고, [[1971년]]에 타계했을 때 유언을 통해 사회 환원을 선언했다.
 
=== 재산의 사회환원 ===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예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유한공업전문대학]]을 운영하였다.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유일한이 살던 [[집]]은 겉은 붉은 [[벽돌]]로, 내부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현재 건물 소유주인 [[성공회대학교]]에서 [[신학]]연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또한 그의 사회기여로 세워진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성공회대학교를 마주하고 있다.
 
=== 유일한 전기 ===
계몽사와 우리교육에서 유일한 전기를 출판하였다.
 
== 연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