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우르바노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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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5세는 공명정대하고 자유로운 교육 후원을 위해 상당한 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헝가리에 대학교를 세웠으며, 1363년 4월 14일 파비아 대학교에 일반 대학(Studium Generale) 지위를 부여하였다.<ref>{{서적 인용|editor=Tomassetti, Aloysius|title=Bullar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aurinensis editio|url=https://books.google.com/books?id=DCxOAQAAMAAJ|edition=Tomus IV|year=1859|publisher=Seb. Franco et Henrico Dalmazzo editoribus|location=토리노|language=라틴어|page=519}}</ref> [[툴루즈 대학교]]의 신학부에는 파리 대학교와 똑같은 권리를 부여했다.<ref>Baluze (1693), I, p. 1057.</ref> [[몽펠리에]]에는 의술 학교를 재건하고 베네딕도회 대학교와 성당을 세웠는데, 특히 수많은 예술품으로 장식된 이 성당은 훗날 이 도시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그리고 꾸작에는 참사회 성당을,<ref>{{서적 인용|author=Louis Moréri|title=Le grand dictionaire historique: ou, Le mélange curieux de l'histoire sacreé et profane|url=https://books.google.com/books?id=oAQ_AAAAcAAJ&pg=RA1-PA213|volume=Tome quatrieme (IV)|year=1740|publisher=Chez P. Brunel|location=암스테르담|language=프랑스어|page=213}}</ref> 이스파냑에는 성당과 도서관을 세웠다. 또한 자기 부모가 묻힌 샤토 드 그리삭이 있는 베두에 인근 언덕 꼭대기에 성당을 세웠다.
우르바노 5세는 크라쿠프 대학교를 세우는데 임시 동의하였고, 1364년 9월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ref>{{
그는 유대인들을 괴롭히거나 개종을 강요하여 강제로 세례성사를 주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파문한다고 선언하였다.<ref>{{
===군사 운동===
우르바노 5세 치세의 큰 특징으로는 로마로 귀환하려고 노력한 점과 로마에 대한 세속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우선 동생 안젤리쿠스 그리모아르를 이탈리아 북부에 교황 특사로 파견하였다.<ref>{{
1365년 5월 카를 4세 황제가 아비뇽을 방문해 황제의 예복의 상징물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교황과 함께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카를 4세는 자신의 영지 중 한 곳인 아를에 갔는데, 그곳에서 대주교 피에르 드 크로스에 의해 아를의 왕으로 추대되었다.<ref>Baluze (1693), I, p. 370.</ref>
우르바노 5세는 튀르크에 맞선 십자군 원정을 간절히 바랐다. 1363년 프랑스 왕 [[장 2세 (프랑스)|장 2세]]와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 (키프로스)|피에르 1세]]가 아비뇽에 찾아와서 튀르크와 전쟁하기로 결정했다. 우르바노 5세와 피에르 1세는 십자군 원정을 실시하기를 간절히 소망했지만, 프랑스는 근래에 [[백년 전쟁]]의 여파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데다가 그들의 지도자 몇몇은 여전히 잉글랜드에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1363년 성토요일에 교황은 특별히 십자군의 십자가를 장 2세와 피에르 1세 두 왕과 [[엘리 드 탈레랑-페리고르]] 추기경에 수여했다. 장 2세는 십자군의 총사령관과 종군 사제를 임명했다.<ref>{{
탈레랑 추기경이 선종한 데다가 장 2세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끌려가자 피에르 1세는 크게 낙담했다. 그렇지만 1365년 10월 11일 그는 자신이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모아서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승전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추가 병력이 없는 데다가 적군이 키프로스군보다 훨씬 벙력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는 하는 수 없이 도시에 대한 약탈과 소각을 지시하고 철수했다. 피에르 1세는 1369년에 암살되기 전까지 시리아와 이집트 해안에 대한 공세를 계속 했다. 우르바노 2세는 장 2세의 군사 원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ref>Baluze (1693), I, p. 371-372. {{
사보이의 아메데오와 헝가리의 [[러요시 1세]]도 1366년 우르바노 5세 재위기간 중에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초반에 그들의 원정은 성공적이었으며, 아메데오는 [[겔리볼루 반도]]를 정복했다. 그렇지만 초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했다.<ref>Dupuy and Dupuy, p. 38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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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떠나있던 우르바노 5세는 이탈리아에서 계속 일어나는 문제와 더불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스웨덴의 비르지타]]의 탄원을 받던 중에 자신의 대리인 알보르노스 추기경이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추기경의 유해는 아시시에 보내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정중히 안장하도록 지시했다. 교황은 1367년 10월 16일 로마에 도착했는데, 이는 교황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교구인 로마 땅을 다시 밟은 것이었다. 그가 로마에 온 것은 순전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의 집전 아래 [[보헤미아의 알주베타]]의 황후 대관식을 보고자 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요청 때문이었지만,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다. 비록 로마 귀환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와 나폴리의 [[조반나 1세]]의 충성 맹세는 물론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의 신앙 고백<ref>Aleksandr Aleksandrovich Vasiliev,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324-1453'', Vol. 2,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0), 671.</ref>을 받아냈다. 새로운 수도 공동체인 [[비르지타회]]의 인가를 받기 위해 로마에 거주하던 스웨덴의 비르지타 수녀는 교황이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1370년 교황을 알현하였다. 비르지타 수녀는 차기 교황이 되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 추기경에게 만일 교황이 다시 로마를 떠난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ref>Chaillan, pp. 197-198.</ref> 실제로 비르지타의 예언대로 교황은 로마를 떠난 후에 선종하였다.
교황령의 일부 도시들에서는 여전히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추기경들의 강력한 요청을 물리칠 수 없었던 우르바노 5세는 1370년 9월 5일 코르네토에서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고, 같은 달 24일 아비뇽에 도착했다. 며칠 후 그는 중병에 걸렸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그는 교황궁에서 자신의 동생인 안젤릭 드 그리모아르 추기경의 거처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370년 12월 19일에 선종했다.<ref>Chaillan, pp. 202-204. {{
==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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