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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81년 TBC 동양방송이 주최하던 세계가요제가 언론통폐합으로 KBS 주최로 열리게 되는데 이때 "연안부두"로 유명한 김트리오의 막내 "김선"이 "사랑은 영원히"로 본선에 오르게 된다. 장덕은 작사를, 김트리오의 "김파"는 작곡을 했다. 6월 그녀는 타이틀곡 <순정>을 비롯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등 신곡 5곡과 현이와 덕이 정규 1집, 그리고 그녀의 첫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 (장덕의 음반)|첫사랑]]》의 수록곡들 중 몇 곡을 골라 그대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 《순정》을 발표한다. 10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우연히 1년이 지난 1979년 9월 9일자 [[선데이서울]] 주간지를 통해 장덕의 자살 소송 기사를 접하게 되고 충격을 받아 장덕을 간곡히 불렀다. 장덕은 어머니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새어머니가 장덕을 짝사랑 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과의 선자리를 주선하여 그녀를 그와 결혼시키려 하자 어린 나이에 겁을 먹고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들어가게 된다. 1980년 10월이었다.
 
[[내쉬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어머니는 오빠 장현 또한 불러서 대학 공부를 시키려 했지만 설득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내쉬빌 한인회가 주최하는 송년파티가 있었다. 장덕과 어머니도 참석했는데, 한인회 회장이 찾아와서 한인사회에 딱 하나 있는 밴드가 실력이 부족해서 곤경에 처해있다며 그들을 도와달라고 장덕에게 부탁한다. 그 밴드의 이름은 '리 패밀리'로 실제 형제들이 조직하여 만든 가족밴드였다. 장덕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금년만 해 보라고 해서 결국은 승낙한다.
 
1981년 장덕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옮기게 되며 그 곳에서 음악의 기초 · 이론 · 감상 · 작곡 · 작곡기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다. 또한 [[내쉬빌]] [[작곡가]]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 한국의 샘터에서 MC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덕은 같은 리 패밀리의 일원이자 자신을 아껴주는 이승언과 결혼을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한다. 당시 어머니는 결혼은 '감옥 같은 것' 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대학 졸업 후에 결혼하라고 충고했지만 장덕은 미국에 온지 1년만인 1981년 10월 17일, [[내쉬빌]]에서 이승언과 결혼한다. 그리고 리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밴드에서 장덕은 퍼스트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며 음악적 리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점점 그녀는 서울에서의 화려했던 가수 생활의 추억을 점점 그리워 하기 시작했고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전자 포커게임으로 한학기 대학 등록금을 다 날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