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프랑스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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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응우옌 왕조 침략 ==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는 19 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을 체결(1858년)한 직후, 무장 침략을 통하여 베트남을 강점하고 자기의 식민지로 삼았다. 185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프랑스군은 [[코친차이나|남키]]의 [[다낭]]·[[비엔호아]]·[[호찌민 시|쟈딘]]·[[:vi:Định딘뜨엉 Tường|딘뜨엉]]({{vie|v=Định Tường|hn=定祥}})등의 땅을 침략하여 점령한 후, 침략을 연장하여 [[통킹]]의 [[하노이]]·[[하이즈엉]]·[[남딘]] 등의 땅까지 세력을 뻗었다. 게다가, 내부의 혼란에 빠진 [[응우옌 왕조]]로 하여금 국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하는 [[:en:Treaty of Saigon|사이공 조약]](1862년)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때 프랑스가 얻은 토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프랑스는 [[제1차 후에 조약]]·[[제2차 후에 조약]]을 맺고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지배 하에서 무거운 세금과 부역, [[소금]]·[[알코올]]·[[아편]]의 전매 등의 착취를 받았다. 저항 운동에 참여한 자의 다수는 비밀경찰에 의해 투옥되고 사형을 당하였다.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로부터 경제적인 수탈뿐 아니라 전통 문화를 파괴당하고 프랑스 문화를 강요당하는 등 전형적인 식민지 정책의 압정을 겪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 점령되고, [[중일 전쟁]]의 확대에 따라,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중화민국]]의 물자를 차단시키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권과 친화 정책을 써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 진주를 인정받았다.
 
=== 응우옌 왕조 성립부터 코친차이나 할양까지 (1802년~1862년) ===
====응우옌 왕조 명명제====
[[응우옌 왕조]] 초기 얼마간, 베트남과 프랑스는 교섭이 없었다가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1789년)과 [[나폴레옹 전쟁]] 종전(1815년) 이후, 통상관계를 요구하고 베트남에 사자를 파견하는 등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ref name="신승하"/>{{Rp|335~337}} 그러나 [[자롱]] 황제는 왕조수립의 공적을 인정하여 프랑스 사람을 우대하고 있었지만, 통상요구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여,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ref name="신승하"/>{{Rp|335~337}} 게다가 [[명명제]]가 즉위(1820년)하면서 점차 프랑스 사람에 대한 우대조치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1826년에는 개국을 요구하는 프랑스 군함의 함장과의 접견을 거부하고, 1826년에는 역시 건국 때의 공적자인 프랑스인 쇼니의 조카가 영사자격으로영사 자격으로 순방을 해왔지만 이것마저 거부해, 베트남과 프랑스의 공식관계는공식 관계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가톨릭 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