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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년]] [[음력 2월 26일]]에 [[이주조]]에게 살해된 이전의 황제 [[북위 효장제|원자유]]에게 경종(敬宗)의 묘호와 무회황제(武懷皇帝)의 시호를 추숭했다. 29일에 고환을 대승상・주국대장군(柱国大將軍)・태사(太師)로 삼았고, [[음력 3월 2일]]에 [[고징]]을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 13일에 백관을 인솔하고 업(鄴)의 궁궐로 들어가 살았다.
 
이후에 고환이 한릉(韓陵)에서 이주천광의[[이주천광]]의 군사를 이겼고 이주씨들이 크게 패하자 절민제가 중서사인 노변(盧辯)을 보내 업에서 고환을 위로하게 하니 고환은 그로 하여금 원랑을 알현케 했으나 노변이 항의하며 사양하고 좇지 않으니 고환이 꺾지 못하고 놓아주었다. [[음력 4월 8일]]에 표기대장군, 행제주사(行濟州事) [[후경]]이 항복해오자 상서복야, 남도대행대, 제주자사로 삼았다. 13일에 안동장군(安東將軍) 신영(辛永)이 건주(建州)를 가지고 항복해왔다. 18일에 원랑이 수도 낙양 북쪽의 망산(邙山)에 도착했는데, 고환은 원랑이 탁발황의 현손이었던 까닭에 원랑과 소원(疎遠)하여서 절민제의 사람됨을 관찰하여 다시 그를 받들려고 했으나 절민제의 정신이 고상하고 밝아 통제하기 어렵다 판단하여 마침내 절민제를 폐위했다. 이후에 고환이 [[북위 효무제|효무제]]를 찾아내 세우려고 하자 효무제는 마침내 원랑으로 하여금 조책(詔策)을 만들어 자리를 선양케 했다. 25일에 효무제가 서자 원랑은 다시 안정군왕으로 강봉되었으나 그해 [[음력 11월 14일]]에 효무제에게 동해왕 원엽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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