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인천 사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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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주당]]은 [[1986년]] [[2월 12일]]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개시하였는데, 초기에는 제도권 야당인 신한민주당과 [[김영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중심이 되었으나, 30만이 운집한 [[광주광역시|광주]] 대회에서는 신한민주당 측의 자제요구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구호가 나타났고, 10만명이 모인 [[대구]] 대회에서는 재야운동 단체인 [[민통련]]의 독자적 플래카드들이 등장하고 신민당과는 별도의 군중대회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4월 29일]], [[김대중]] 민추협 공동 의장이 소수 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다음날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이민우 (1915년)|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가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급진적인 세력과 단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입장 표명에 분개한 재야와 운동권 세력은,
1만여 명의 시위대는 도로를 장악하고 산발적인 시위를 하다가 오후가 되면서 [[스크럼]]을 짜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경찰]]과 충돌하였다. 시위대는 [[신한민주당]]의 각성을 요구하고 이원집정(二元執政) 개헌 반대를 외치며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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