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리비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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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조정은 청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고, 중국도 전쟁에 동의를 했고, 흑기군을 보내 지원했으며, 통킹에서의 프랑스 작전에 은근히 반대했다. 청나라 조정은 또한 통킹이 프랑스 통제 하에 들어가도록 좌시하지 않겠다고 프랑스에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1882년 여름 중국의 [[윈난 성|운남]]과 [[광시 성|광서]]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통킹으로 들어와 랑썬, 박닌, 훙호아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청나라의 프랑스 대사인 프레데리 부리(Frédéric Bourée)는 청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전망에 경악했다. 그리하여 1882년 11월과 12월 청나라의 [[리홍장]]과 통킹을 프랑스와 청나라의 영향권으로 나누자는 협상을 했다. 베트남은 이 양자 협상에 대해 어느 나라와도 고려되지 않은 채 배제되었다.<ref>Eastman, 57–65</ref>
 
리비에르는 부리의 협상을 싫어했고, 1883년 초에 이 문제를 강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최근에 프랑스에서 해군 보병 중대를 파견 받았고, 하노이를 걸고 모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1883년 3월 27일, 하노이에서 해안까지 통신선을 확보하기 위해 리비에르는 개인 명령으로 520명의 프랑스 군인과 함께 [[남딘 성]]을 점령했다.<ref>Bastard, 160–71; de Marolles, 178–92; Duboc, 97–112; Thomazi, ''Histoire militaire'', 53–4</ref> 남딘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에 흑기군과 베트남군은 하노이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3월 28일 벌어진 〈[[자꾹 전투]]〉에서 대대 지휘관 베르트 드 빌레아에게 격퇴당했다.<ref>Bastard, 156–60; de Marolles, 187–8; Duboc, 111–12; Thomazi, ''Histoire militaire'', 54–5</ref> 리비에르는 환호했다 : “이것으로 그들에게 통킹 논의를 진전시킬 걸세!”
 
리비에르의 타이밍은 완벽했다. 그는 [[남딘 점령]]으로 면직당할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대신 그가 시대의 영웅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변화가 있었고, [[쥘 페리]]의 새 행정부는 식민지 확장을 강력하게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리비에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페리와 그의 외무장관 폴 아르망 샤르멜 라꾸는 리홍장과 부리의 협상을 비난하고 불운한 프랑스 대사를 소환했다. 그들은 또한 청나라에게 통킹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삼기로 했다고 분명히 했다. 1883년 4월, 베트남이 프랑스에게 효과적으로 저항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청나라의 고관 [[당경숭]](唐景崧)은 유영복에게 흑기군으로 리비에르를 상대로 일전을 치루라고 설득했다.
 
==패배와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