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리비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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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5월 10일, [[유영복]]은 프랑스에게 조롱하는 어투로 “한판 붙자”는 벽서를 하노이 성벽 여기저기에 붙였다. 5월 19일, 리비에르는 하노이 성 밖으로 나가 흑기군을 공격했다. 그의 소규모 군대(약 450명의 병력)는 제대로 된 경계도 하지 않고 진격했고, 하노이 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지교(紙橋)에서 잘 준비된 흑기군의 매복 속으로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지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양 날개가 포위되었고, 어렵게 재정비를 해서 하노이로 퇴각할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갈 무렵 프랑스 대포가 반동의 충격으로 뒤집혔고 리비에르와 장교들은 포병을 돕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 흑기군은 뭉쳐 있는 병사들에게 집중 사격을 퍼부어 프랑스 장교 1명을 죽이고, 리비에르의 어깨에 중상을 입혔다. 몇 초 후 리비에르는 쓰러졌다. 프랑스 전선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흑기군은 앞으로 쇄도하여, 프랑스군의 후위를 밀쳐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여러 명의 프랑스 장교가 부상을 입었고, 정신없이 후퇴하는 통에 리비에르의 시신이 전장에서 버려졌다. 그가 부상이 영향으로 죽지 않았다면, 흑기군이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그를 살해했을 것이다.<ref>Bastard, 171–89; de Marolles, 193–222; Duboc, 123–39; Thomazi, ''Conquête'', 152–7; ''Histoire militaire'', 55–8</ref>
[[File:Riviere pushing the cannon forward at Sontay.jpg|thumb|지교에서 진창에 빠진 대포를 끌여내려 하는 리비에르]]
 
지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심각한 패배를 당했지만, 통킹에 프랑스 보호령을 확고히 수립하겠다는 쥘 페리 행정부의 결의는 강화되었다.
 
리비에르의 패사 소식은 5월 26일 파리에 도착했고, 프랑스 해군 장관 페혼(Peyron)은 ‘프랑스가 영광스러운 아들의 복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 의회는 즉시 강력한 원정대를 통킹으로 파견할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350만 프랑의 채권을 즉각 승인했다.
 
통킹에서 리비에르가 한 모험으로 몇 년이 지나 [[코친차이나]]를 넘어 [[인도차이나]] 전체로 프랑스의 통치가 확장되었다.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