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리비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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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말 리비에르는 [[하노이]]에 소규모 프랑스군과 함께 프랑스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베트남 현지인들의 불만을 조사했다. 그는 상급자의 지시를 어기고, 1882년 4월 25일 하노이 성을 몇 시간 만에 급습했다. 성주 [[호앙지우]](黃耀)는 자살하면서, [[뜨득 황제]]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이후 리비에르가 요새를 베트남에게 반환했지만, 베트남과 청나라 모두 무력에 대한 그의 의지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리비에르와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던 베트남 조정은 잘 훈련되고, 노련한 [[흑기군]]을 가진 [[유영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흑기군은 프랑스에게 날카로움을 증명해야 했다. 흑기군은 이미 1873년 [[프란시스 가르니에]] 대위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에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적이 있었다. 1882년의 리비에르와 마찬가지로, 가르니에도 월권을 해서 베트남 북부에 군사적 개입을 시도했다. 유영복은 베트남 조정에 의해 부름 받았고, 하노이 성벽 아래에서 베트남인들을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던 가르니에의 소규모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다. 가르니에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프랑스 정부는 나중에 그의 원정을 부인했다.
 
베트남 조정은 청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고, 중국도 전쟁에 동의를 했고, 흑기군을 보내 지원했으며, 통킹에서의 프랑스 작전에 은근히 반대했다. 청나라 조정은 또한 통킹이 프랑스 통제 하에 들어가도록 좌시하지 않겠다고 프랑스에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1882년 여름 중국의 [[윈난 성|운남]]과 [[광시 성|광서]]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통킹으로 들어와 랑썬, 박닌, 훙호아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청나라의 프랑스 대사인 프레데리 부리(Frédéric Bourée)는 청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전망에 경악했다. 그리하여 1882년 11월과 12월 청나라의 [[리홍장]]과 통킹을 프랑스와 청나라의 영향권으로 나누자는 협상을 했다. 베트남은 이 양자 협상에 대해 어느 나라와도 고려되지 않은 채 배제되었다.<ref>Eastman, 57–65</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