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7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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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그리오라티는 [[아브루초 주]] [[술모나]]의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페루자와 파도바에서 시민법과 교회법을 가르치면서 명강사로 유명해졌다. 스승 [[조반니 다 레냐노]]의 후원을 받아 로마로 간 그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로마 교황청에 등용되었다. 우르바노 6세에 의해 잉글랜드에 가서 10년 동안 교황 징세관의 일을 한 그는 1386년 볼로냐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는 [[볼로냐]]의 주교에 임명되었으며, 1387년에는 라벤나로 전보되어 [[라벤나]]의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1389년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그를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한 다음 몇 가지 예민하고 중요한 임무를 띤 교황 특사에 임명했다. 보니파시오 9세가 선종하자 아비뇽에서 대립 교황 측이 보낸 대표들이 로마에 찾아왔다. 로마의 추기경들은 아비뇽 대표단에게 만일 콘클라베 소집을 보류한다면 대립 교황이 먼저 자진 사임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비뇽 대표단이 단도직입적으로 자신들의 대립 교황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자, 추기경들은 당초 예정대로 콘클라베를 소집했다. 그렇지만 추기경단 모두 투표에 앞서 누가 교황이 되든지간에 서구 대이교를 종식시키고 교회 일치를 이룩하는데 필요하다면 교황직을 사임하기로 맹세했다. 그 공로로 라디슬라오는 인노첸시오 7세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자신의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2세]]를 지지하고 있는 아비뇽의 대립 교황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 생애 교황==
미그리오라티가 1404년 10월 17일 만장일치로 선출되어 인노첸시오 7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에서는 기벨린파가 폭동을 일으켰으나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군대를 이끌고 서둘러 로마에 와서 폭도들을 진압함으로써 진압되었다.
133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술모나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페루자와 파도바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6세]]에 의해 [[영국]]에 파견되어 10년간 [[교황청]] 징세관의 일을 하였다. 1387년 라벤나의 [[대주교]]가 된 후 1389년 볼로냐로 전보되었고 1390년에 [[추기경]]이 되어 이탈리아 북부의 사절로 일하였다.
 
== 생애 ==
1404년 교황이 되었으나 [[서방 교회의 분열]]로 인해 정치적으로 쌓인 문제가 많았다. 선출되기 전에 [[기독교]]의 일치를 이룩하는 데 필요하다면 교황직을 사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대립 교황]]에게 제의하여 회의를 열고자 하였으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완고함과 교황의 조카 루도비코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반란으로 인한 인노첸시오 7세의 도주, 나폴리 왕국의 [[교황령]] 침입, 무엇보다도 인노첸시오 7세의 짧은 재위는 그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