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7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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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보호자 라디슬라오가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으며, 1406년 1월 로마 시민들은 교황의 주권을 다시 인정하면서 인노첸시오 7세는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라디슬라오는 과거 교황과 했던 약조에 만족하지 못하고 로마와 교황령에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키우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1405년 로마에서 일어난 기벨린파의 폭동을 지원하였다. 라디슬라오가 콜론나파를 도와주기 위해 보낸 군대는 표면상으로는 여전히 바티칸을 지키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산탄젤로 성]]을 사실상 점거하면서 로마와 인근 지역에 자주 출격하러 나갔다. 라디슬라오는 파문당한 후에야 비로소 교황의 요구에 굴복하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1404년 인노첸시오 4세는 교황 선출 직후 서구 대이교를 극복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을 선언함으로써 콘클라베에 앞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 왕 [[샤를 6세]]와 [[피에르 다일리]]와 [[장 제르송]] 같은 파리 대학교의 신학자들, 독일의 왕 [[루프레히트]] 등도 공의회를 서둘러 소집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1405년에 문제가 생기는데, 인노첸시오 7세가 자신의 맞수인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공의회가 소집될 로마에 갈 때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다고 함으로써 상대 측에게 공의회 참여를 피할 구실을 제공한 것이다. 대립 교황 베네딕토의 눈에는 인노첸시오 7세가 서구 대이교를 종식시키는데 있어서 유일한 장애물로 비춰졌다. 인노첸시오 7세는 평화를 위해서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함께 사임해야 한다는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다.
==사망==
▲1406년 3월 로마로 귀환하여 로마 대학교를 재조직할 계획을 세웠으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그마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인노첸시오 7세는 1406년 11월 6일 갑작스럽게 선종하였다. 이후 잠시 그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에 대한 증거가 없어서 곧 부정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교황 그레고리오 12세]]가 선출되어 즉위하였다.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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