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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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권력과 경제로 인한 반란들이 잇달았다. 특히 [[822년]]의 [[김헌창의 난]]과 [[846년]]의 [[장보고의 난]] 등은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신라는 무지막지한 타격을 받는다. 정치에 도전하다 실패한 후 남정네들과향략을 놀아나며즐기며 그들에게정사를 권력을돌보지 맡기고 말은 것이다않았다. 호족들은 이 틈을 타 성장했고, 889년엔 서라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에서 세금을 걷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민란의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