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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慕容垂)의 넷째 아들로 모친은 난빈이다. [[369년]]에 모용수가 [[전진 (오호십육국)|전진]](前秦)으로 망명하고 전진에서 생활하는 동안 모용수의 장남이 죽었기 때문에 모용조가 [[황태자]]가 되었다. [[부견]](苻堅)의 궁정에서 전진 태자의 말을 씻기는 직책을 맡았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하자 모용수가 거병하는 것을 도왔으며 [[39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모용보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395년]]에 [[북위 (북조)|북위]](北魏)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복수전을 치르던 도중 모용수가 [[396년]] 4월에 진중에서 병사하여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모용보는 배다른 동생인 [[모용륭]](慕容隆), [[모용농]](慕容農) 등의 보좌를 받으며 치세를 시작하였다. 즉위하자마자 호구 조사와 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잃었으며 11세의 어린 아들 [[모용책]](慕容策)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 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 8월에 북위가 침공을 개시하여 하북 일대를 석권하자 모용보는 중산, [[업 (지명)|업]](鄴), 신도 등의 거점을 중심으로 농성을 시작하였다. [[397년]]에 탁발규가 신도를 함락하자 모용보는 반격을 개시하여 북위군과 호타수에서 맞붙었으나 대패하여 다시 중산에서 농성하였다. 3월에 대장군 [[모용린]](慕容麟)이 모용보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모용보는 모용린이 유주의 군대를 탈취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산을 버리고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용성으로 이동하던 도중 차남 [[모용회]](慕容會)의 군대를 만나 호위를 받았는데, 모용회가 모반을 일으켜 모용륭이 [[풍발]]의 도움으로 간신이 살아남고 모용보와 모용농은 용성으로 도망쳤다. 모용회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모용보는 용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추스렸다. 397년 말에 북위의 군대가 약화되고 업을 지키는 [[모용덕]](慕容德)이 남쪽으로 되돌아 올 것을 주청하는 표문이 올라오자 모용보는 대군을 동원하여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꾀하였다. [[398년]] 봄, 모용보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작전을 수립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끈 채 갈팡질팡하였으며, 이로 인해 결국 단속골과 [[난한]]의 군대가 모반을 일으켜 모용보를 시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