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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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연]]과의 전쟁 ===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수장 [[모용외]](慕容廆)가 333년에 사망하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모용부의 대인(大人)이 되었다. 모용황의 아우인 [[모용인]](慕容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고국원왕은 336년에 망명해온 곽충(郭充)과 동수(佟壽)를 맞아들였다. [[338년]]에 전연과 [[후조]](後趙)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자,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封抽)·송황(宋晃) 등이 망명을 요청해 그들을 받아들였다.<ref name="encykorea" />
 
[[339년]]에 전연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렀다.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자, 전연은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에 [[모용황]](慕容皝)은 용성(龍城)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모용황은 왕우가 이끄는 1만 5천의 소수 군대를 평탄한 북쪽 길로 보내고, 자신은 한수와 함께 5만 대군을 이끌고, 험난한 남쪽 길을 택해 공격하는 기만전술을 썼다. 하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한 고국원왕은 북쪽으로 왕제 무(武)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자신은 소수의 군대로 남쪽을 지켰다. 결국, 남쪽 전투에서 크게 패한 고구려군 중에서 장군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가 전사하고, 환도성이 함락되었으며, 고국원왕은 단신으로 단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