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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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5세는 해당 사제들을 교회에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를 교회법이 아닌 세속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베네치아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교황은 재산법과 성직자 구금을 이유로 1605년 크리스마스에 베네치아 의회에 성무금지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베네치아의 입장은 교회법학자인 [[파올로 사르피]] 신부가 철저히 변호했다. 그는 이 사건을 세속의 영역과 교회의 영역의 분리를 정의하는 원칙으로 확대했다. 1606년 4월 교황은 베네치아 정부를 파문하고 베네치아 도시 전체에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사르피 신부는 교황의 성무금지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베네치아 정부의 편에 서서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고 강하게 조언했다. 기꺼이 그의 충고를 받아들인 베네치아 정부는 역사적으로 교황이 세속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불법이었다는 사르피 신부의 주장을 바오로 5세에게 제출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의 권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예수회]]와 [[테아티노회]], [[카푸친회]]를 제외한 베네치아의 나머지 가톨릭 성직자들도 베네치아 정부를 지지했다. 베네치아 정부는 정부의 방침을 따르지 않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모두 베네치아 영토 밖으로 추방했다. 교황의 뜻을 거스르고 베네치아에는 계속 미사가 드려졌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는 공공장소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기념했다. 1년 만인 1607년 3월 프랑스와 스페인의 중재로 양측의 의견 차이가 조율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법률 철회를 거부하되 가톨릭 신앙은 계속 지켜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수회는 베네치아에서 불온분자 내지는 교황의 첩보원으로 간주되어 계속 입국이 금지됐다. 더이상 베네치아와 싸워봤자 이득이 없다고 판단한 바오로 5세는 자신이 내린 단죄를 철회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국의 훌륭한 교회법학자인 파올로 사르피 신부에게 공로를 치하하는 차원에서 국가 공문서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국가변호사 지위를 수여했다. 이 소식은 바오로 5세를 극도로 화나게 만들었다. 1607년 9월 사르비 신부를 로마로 오도록 꼬드기는데 실패한 교황은 그에 대한 살인을 청부했다.<ref name="ROB">Robertson, Alexander, ''Fra Paolo Sarpi: the Greatest of the Venetians'', London: Sampson, Low, Marston & Co. (1893), pp. 114–117</ref><ref>Watson, J. Henry, ''The History of Fra Paolo Sarpi'', New York: La Croce (1911)</ref> 사르피 신부는 최소한 9월과 10월에 두 차례 암살 표적이 되었다.<ref name="ROB"/> 단도로 15회 찔린 사르피 신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며, 암살범들은 교황령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다.<ref name="ROB"/>
 
====일본과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