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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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韓百謙, [[1552년]]~[[1615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호는 구암(久菴)이다. <ref name="경향신문">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031450171&code=900308</ref>
 
==생애==
===선조와 배경===
한백겸은 [[1552년]]에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이며, 한상경의 손자로 좌찬성을 지낸 [[한계희]](韓繼禧)가 한백겸의 직계 선조가 되었다. 판관벼슬을 지내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삼촌 [[한효순]]은 정승의 지위있던 고관대작이었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 name=view&artid=200708031450171&code=900308<"경향신문"/ref> 한백겸의 아우 [[한준겸]]은 뒤에 문장에 뛰어난 고관으로 [[인조]]의 장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백겸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젊은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던 습정(習靜) [[민순]](閔純)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돈독하게 학문연마에 생애를 바친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 name=view&artid=200708031450171&code=900308<"경향신문"/ref>
===학문연마와 관직생활===
한백겸은 과거시험에는 응하지 않고 학문 연마에만 힘을 쏟다가, 주변의 천거로 받아 관직에 올라 호조좌랑·형조좌랑을을 지내다가 외직인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강원도 [[영월]][[군수]]에 부임했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와 호조참의를 지냈다. 1612년 60세 때에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64세에 명저인‘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그해 가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031450171&code name=900308<"경향신문"/ref> 묘갈명은 정경세가 썼다.
===사후===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은 [[우의정]]을 역임했고, 아우 [[한준겸]]은 [[인조]]의 국구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아들이 정승에 오르고 조카딸이 왕비에 오르면서 한백겸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자신이 세웠으며 [[원천석]]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그자신도 배향된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101445131&code name=900308<"경향신문"/ref>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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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지리지는 60장에 이르는 작은 책자이다. 불과 한 편의 논문에 지나지 않은 책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가 있다. 기전도는 [[고조선]]의 왕 [[기자]](箕子)가 시행하였다는 [[정전]](井田)제도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유제설과 한백겸의 이 그림이 후대의 토지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 name=view&artid=200708031450171&code=900308<"경향신문"/ref>
후대에 실학자들이 쓴‘반계수록’과 ‘경세유표’ 에는 토지정책의 핵심은 토지소유의 평등, 균등화로 분배를 공정히 하자는 것으로, [[주자]](朱子)가 부인한 이유로 주자 이후의 보통의 [[성리학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던 정전제도가 한백겸의 실증적 연구결과를 통해 실재했음이 밝혀져 뒷세대에 전제(公田制)의 확충을 주장하던 실학자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031450171&code name=900308<"경향신문"/ref>
 
==평가==
한백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통곡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당대의 재상이며 한백겸의 절친한 친구였던 오성 [[이항복]]이 최초로 통곡한 사람으로 그는 한백겸의 죽음에 제문을 바쳤다. 이항복은 우선 한백겸이 당대의 주역 연구의 큰 학자라 하였으며,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의 세상에서 모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고 하였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 name=view&artid=200708031450171&code=900308<"경향신문"/ref> 또 다른 친구로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지낸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있는데, 뒤에 정경세는 한백겸의 [[묘갈명]]을 지어 한백겸은 당대의 주역학자로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하며 칭송하였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 name=view&artid=200708031450171&code=900308<"경향신문"/ref>
 
‘반계수록’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쓴 반계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것이,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고 격찬하며 그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031450171&code name=900308<"경향신문"/ref>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구암유고 동국지리지 서문에서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라고 평가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