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체 베아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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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aigoTsugumichiAndBeato1882.jpg|섬네일|[[사이고 주도]]와 베아트(앞에 앉은 인물) 그리고 친구들([[1882년]], [[:en:Hugues Krafft|휴그 크래프트]] 촬영)]]
[[1866년]] 부타야 화재 사건(豚屋火事)으로 [[요코하마]] 거류지가 전소되었기 때문에, 베아토는 자신의 사진관과 네거티브를 잃었다. 그 후 2년간 대체 작품을 적극적으로 촬영했다. 그 결과, 2권의 사진집에, 100장의 인물 사진과 풍속 사진으로 구성된 《네이티브 타입즈》(''Native Types'')와 98개의 명소와 도시 풍경으로 구성된 《일본의 풍광》(''Views of Japan'')이 완성되었다. 사진의 대부분은 인력을 투입하여 색을 입혔지만, 이것은 일본의 수채화와 목판 인쇄 기술을 유럽의 사진에 응용한 것이었다. [[1869년]]부터 [[1877년]]에 걸쳐, 요코하마에서 ‘비토 앤 컴퍼니 포토그래퍼’(F. Beato & Co., Photographers)를 경영했다. 워그먼과의 공동 경영은 해지되었고, 우렛(H. Woolett)이라는 도우미와 4명의 사진작가와 4명의 일본인의 착색 화가를 고용했다. [[구사가베구사카베 김베이]]가 독립 전에 베아트에 고용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베아토는 [[우에노 히코마]] 등과 함께 촬영을 진행했다. 또한 [[라이문트 폰 슈티르프리드]] 남작에게 사진을 가르친 것도 베아토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베아토는 사진 사업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업을 맡았다. 토지 일부와 사진관을 가지고 있던 것 외에도 부동산 컨설턴트, 요코하마 그랜드 호텔에 출자하였고, 카펫과 여성용 가방 수입 등을 하였다. 또한 원고, 피고, 또한 증인으로 법정에 여러 번 선 적도 있었다. [[1873년]] [[8월 6일]], 베아토는 주일본 [[그리스]] 총영사에 임명되었으며, 이것은 [[코르푸 섬]]에 살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