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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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헤이안]](平安) 후기에 다이라노 다다쓰네(平忠常)의 난([[1028년]])을 진압한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賴信)의 공에 따라 그 아들 요리요시(賴義) 때 당시 [[기나이]](畿內)의 [[가와치 국]](河內國) [[이시카와 군]](石川郡, 지금의 [[오사카 부]] [[하비키노 시]])을 본거지로 하는 가와치 겐지(河內源氏)의 영지가 되었다. 요리요시의 맏아들이자 가와치 겐지의 3대 도료(棟梁, 당주)였던 요시이에(義家)의 4세 손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로서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이곳에서 처음 연 이래 막부의 요직에 임명된 유력 [[고케닌]](御家人)들이 가마쿠라에 주거지를 지었고, 바다에 접해있다는 장점을 살려 해상 교역도 융성하였을 뿐 아니라(가마쿠라 가도街道라 불리는 교통로도 이때 정비되었다)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했던 '가마쿠라 5산(山)'이라 불리는 사찰들도 위치해 있어 가마쿠라는 간토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1225년에 [[싯켄]](執權)이 된 [[호조 야스토키]](北條泰時)는 렌쇼(連署)나 효조슈(評定衆)를 두어 막부 내의 합의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정권의 중심지를 요리토모 이래의 오오쿠라(大倉)에서 우쓰노미야즈시(宇都宮辻子)로 옮겼다. 1232년에는 무사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를 제정해 막부의 체제를 다졌다. 1333년에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막부 타도 계획에 호응한 [[고즈케 국]](上野國, 지금의 [[군마 현군마현]])의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는 분바이가와라(分倍河原) 등지에서 가마쿠라 막부를 좌지우지하던 호조 집안의 군사를 격파하고 가마쿠라로 진격해 야스토키 이래의 호조 집안의 보리사(菩提寺)였던 도쇼사(東勝寺)에서 호조 집안을 멸망시켰다(1953년의 도쇼사 조사에서는 무수히 많은 자상을 입은 인골이 발굴되기도 했다).
 
[[겐무 신정]](建武新政)이라 불리는 천황 친정이 시작되면서 교토로 소환된 요시사다 대신으로 앞서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같은 옛 가마쿠라 막부의 관인들을 멸하는 등 막부 타도에 많은 공을 세웠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나 그 일족인 호소카와(細川) 집안 등이 친왕을 받들어 가마쿠라쇼군부(鎌倉將軍府)가 성립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조 집안의 잔당들이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으로 가마쿠라가 함락되자 다카우지는 토벌을 위해 나섰지만, 이후 군사를 돌려 천황의 신정체제에 반기를 들고 가마쿠라에서 독자적인 논공행상을 행했으며, 자신을 추토하러 나선 요시사다 등을 쳐부수고 교토에서 북조를 세워 새로운 무가정권을 수립, 가마쿠라에는 자신의 아들 요시아키라(義詮)를 파견했다. 하지만 집안 내부의 다툼이 간노(觀應)의 요란(擾亂)이라 불리는 내전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요시아키라는 교토로 소환되었고 대신 다카우지의 둘째 아들 모토우지가 가마쿠라에 파견되어 [[가마쿠라 부]]가 설치, 이후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로써 간토를 통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