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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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본주의적으로 생각되는 이에야스이지만, 실제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시대의 사람이었고, 또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규제완화에 의한 경제진흥책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로부터, 성장중시의 경제 진흥파였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평화가 도래하여 대량의 병사(무사)가 비생산적인 군사생활에서 행정활동으로 옮아가고, 광역적인 개간활동이 각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까지 긴 성장을 계속해왔던 경제는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고도성장시대가 시작되었다.
==== 기독교 금지령 ====
에도시대에는 [[나가사키 현나가사키현|나가사키]] [[데지마]]에서의 [[중국]], [[네덜란드]]와의 교류와 [[쓰시마 번]]을 통한 [[조선]]과의 교류 이외에는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폈다.(하지만 실제로는 류큐를 통한 대명, 청 교역이나 북방교역이 존재했다.) 바테렌(기독교 선교사)추방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령하였지만, 쇄국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시마바라의 난]]으로, [[기독교]]와 [[잇키]]의 협력으로 인해 농민들의 난을 제압하기가 힘들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의 [[정치]]적 위험성이 강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 쇄국정책 ====
또한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일본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에게는 일본 식민지화의 의도가 있어 위험하다고 막부에 조언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정책을 해금(海禁)정책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에는 주로 연안지역의 [[왜구]]를 포함한 해적 방어와 해상에서의 밀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일본의 쇄국과는 사정이 다른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쇄국도 중국의 해금과 같이 쇄국보다는 해금이라고 하는 쪽이 적당하다는 설명도 있다. 쇄국정책이 실시되기 이전에는 일본인의 해외진출은 활발했고, [[동남아시아]]에 많은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또한 [[태국]]에 건너간 [[야마다 나가마사]]처럼 그 나라에서 중용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