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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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성혼'''(成渾, [[1535년]] [[6월 25일]] ~ [[1598년]] [[6월 6일]])은 [[조선]]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 [[성수침]]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서인 영수로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覆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할 뜻을 세웠다. 선조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도 나가지 않았으나, [[이이]]의 거듭된 추천으로 출사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심의겸]]이 몰락한 뒤 [[서인]]을 지도하였다. 그 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최영경]], [[정개청]]을 구원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역으로 [[동인]]들로부터 그가 [[최영경]], [[정개청]] 등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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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 ====
 
[[파일:Huam Baik In-geol.jpg‎|thumb|left|130px|스승 [[휴암 백인걸]]<br />(그는 [[조광조]], [[김식]], [[김안국]]의 학통을 다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에게 전수하였다.)]]
{{참고|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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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 정치 활동과 후학 양성 ====
 
[[경기도]][[관찰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특별히 [[전생서]] [[능참봉|참봉]](參奉)을 제수받았는데, 이후 계속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적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고 [[공조]][[좌랑]]과 [[공조]][[정랑]]을 잠시 지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이이]] 등이 찾아와 그에게 관직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조선 명종|명종]] 말엽에 [[이량]], [[이기]], [[심통원]], [[윤원형]] 등의 외척 권신들이 몰락하고 사림파들이 정치에 등용되자 그 역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거나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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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사와 관료 생활 초반 ====
 
[[파일:선조 어필.JPG|썸네일|왼쪽|110px|[[조선 선조|선조]] 어필]]
선조 즉위 후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1568년(선조 1년)에는 이황을 만나 사물을 담론하였다. 이때 그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절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뒤로 [[1572년]]부터 7년간 [[이이]]와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기 논쟁을 한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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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목]] 주내면 항양리(현 파주시 파주읍 항양리 산 8-2)에 안장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북인]]들에 의해 [[기축옥사]]와 [[정여립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삭탈관작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복권여론이 나와 [[조선 인조|인조]] 때인 [[1633년]](인조 11년) 복직되고, 그 뒤 다시 [[증직|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그 뒤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임진왜란]] 당시 임금을 외면하였다고 꼬투리잡아 비난하였다. [[1623년]]부터 [[서인]]계 유생들이 그를 문묘에 종향하려 하였고, [[조선 숙종|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으나종사되었으나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되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복향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여산의 죽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배향되었다. 후에 그의 묘소는 [[경기도]]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 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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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그가 임금의 피난 행차를 못봤는가, 보고도 가지 않았는가 여부는 그의 사후 200년간 논란거리가 되었다. [[동인]] [[이홍로]]는 그가 어가를 보고도 일부러 오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자신의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루게 하라고 했다.
 
후일 미수 [[허목]],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가 이이와[[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문묘 종사를 반대하면서 내세웠던 논리는 바로 [[이홍로]]가 그를 공격한 것, 일부러 어가를 보고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