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사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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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1871년]] 8월 29일의 [[폐번치현]](廢藩置縣)을 거쳐, 12월 31일에 옛 와카사 국에 쓰루가 군(敦賀郡)·이마다테 군(今立郡)·난조군(南条郡)을 더해 쓰루가 현(敦賀県)이 형성되었다. [[1873년]]([[메이지]]明治 6년) 1월, 이마다테·난조를 제외한 영북(嶺北)을 구성하고 있던 아스와 현(足羽縣)이 편입되고, 쓰루가 현은 지금의 [[후쿠이 현]](福井県)과 같은 지역을 영유하게 되었다.
 
[[1876년]](메이지 9년) 8월 21일, 쓰루가 현이 분할되고, 쓰루가 군과 와카사 지방(영남嶺南)은 [[시가 현시가현]](滋賀縣)에 편입되었다. 4년 반이 지난 [[1881년]](메이지 14년) 2월 7일, 영남 4군과 영북에 후쿠이 현이 형성되었는데, 오뉴 군의 유지 및 후쿠이 현 설치, 사카이 현(堺県)의 [[오사카 부]](大阪府) 병합은 갑작스럽게 결정되고 사람들에게 통보되었다. 당시 현의 영남 분할을 시가 현의 교토 병합으로 인식했던 당시의 시가 현 현령은 몇 번이나 영남 4군의 시가 현 복귀를 정부에 청원했으나 기각되었고, 후쿠이 현 설치 뒤 처음으로 임시 현의회에 대항으로 운동권 중심인사 1명과 오뉴 군 2명, 쓰루가 군 1명이 현의회 의원을 사직하는 등 시가 현으로의 복귀 운동은 이후 1년 반 동안을 다양한 형태로 이어졌다. [[1881년]](메이지 14년), 후쿠이 현령은 전신 시설의 설치를 정부가 계획한 다른 지역보다도 우선적으로 영남 땅에 건설하기로 결정, 오하마 초등사범학교, 중학교 개설비를 원안대로 가결하고 그 해 안에 설치할 것을 시달하는 등의 배려 정책을 폈다. 영북과 영남 지역 대립 구도는 [[1881년]]부터 약 10년간, 후쿠이 현의 행정에서 극복해야 할 큰 과제로 남았다.
 
메이지 전기에는 마이쓰루 진수부(舞鶴鎭守府)가 설치되고, 오하마 선(小浜線)의 개설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