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터브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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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운동은 미국 언론 사이에서 터브먼을 향한 새로운 존경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성 시대》 (''The Woman's Era'')라는 한 출간물은 “뛰어난 여성들”이라는 연재 글을 실으면서 터브먼에 대해서 다루기도 하였다.<ref name="Lar275"/> 1897년 여성 참정권론을 지지하는 한 신문에서는 터브먼을 기리며 그가 나라에 공헌한 업적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었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봉사로 그는 여전히 가난하였으며, 오히려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기차표를 사려고 소를 파야할 지경이었다.<ref>Larson, p. 281.</ref>
 
=== 감리교 시온 감독교회감리교감독시온교회, 병, 그리고 죽음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터브먼은 오번의 [[감리교시온감독교회감리교감독시온교회]]({{llang|en|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 }}<ref>미국 [[감리교]]의 흑인 감리교회 교단이다. 백인과 흑인의 차별이 심하던 19세기 시절 인종차별주의 백인들의 반대와 공격을 피하기 위해 북 감리교회가 흑인 선교를 위해 구분하여 설립한 감리교회이다. 현재도 감리교의 감독제를 따르고, 미국의 연합감리교회와 협력하여 선교와 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2015년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이 총격을 가했던 사우스캐롤리나 주의 흑인 교회가 소속된 교단이다. </ref>)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1903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땅 조금을 [[교회]]에 기부하였으며, “나이 들고 궁핍한 흑인들”을 위한 집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하였다.<ref>Clinton, p. 209에서 인용</ref> 5년 후에야 그런 집들이 지어졌으며, 거주민들에게 교회가 100달러씩의 입주비를 걷는 걸 보고 터브먼은 매우 불쾌해하며 말했다. "그들이 100달러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는 그런 규칙을 만들어놨더군요. 나라면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 없다는 규칙을 세웠을 텐데요."<ref>Larson, p. 285에서 인용</ref>}} 그는 이 새로운 규칙을 싫어하였으나, 이후 1908년 6월 23일에 열린 해리엇 양로원에서 그는 명예 초청객이었다.<ref name="korq"/><ref>Clinton, pp. 209–210.</ref>
[[파일:Harriet Tubman late in life3.jpg|right|thumb|250px|해리엇 터브먼,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