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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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프로이센은 유럽 각국들 사이에서 중소 규모의 국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최근 난잡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정확히는 1733년~1735년에 걸친 라인 강 전역)에 참여했지만, 이때 마저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은 유럽 각국들로부터 독일에서나 통하는 그런 정도의 군사력을 가졌다고 간주되었다.
 
오직 몽상가라고 부를만한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의 군대와 맞설만한 강력한 군대라고 프로이센군을 평가하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ederick William I. 재위는 [[1713년]] [[2월 25일]] - 1740년 5월 31일)는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강하게 군사를 훈련시켰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훌륭하게 훈련되어 있었고, 장비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오스트리아군이 3발의 총알을 쏠 때 5발을 쏠 수 있었다. 프로이센의 [[기병]]대와 [[포병]]대는 보병대에 비교하면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타국에 비교해서 훌륭한 수준이었다. 프로이센은 동부에 위치한 폴란드의 훌륭한 기병대와 격전을 벌이곤 했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강력한 스웨덴의 포병대에게 고전하면서 상당한 경험을 쌓은 바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사망으로 즉위( [[1740년]] [[5월 31일)한]] 즉위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2세]]의 군대는 초반의 전쟁준비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고, 이에 따라 유리하게 전쟁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이는 전문적인 [[상비군]] 제도를 충분히 발전시켜 완숙기에 이르도록 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군이 야전병력을 집결시키는 동안 프로이센 군대는 유리한 고지를 미리 선점하였고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슐레지엔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로이센군은 11월 초 [[오데르 강]](Oder River)을 따라 서서히 진군하였다. 1740년 11월 16일,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 국경을 넘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지역 사령관들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소규모의 [[요새]]에 있던 적은 숫자의 수비 병력밖에 없었다. 이들은 결국 수비병을 남겨두고 남은 소규모 군세를 이끌고 [[보헤미아]](Bohemia)와 [[모라바]](Moravia)의 국경에 있는 산으로 물러나야 했다.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조직화된 프로이센군은 겨울을 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슐레지엔 전역을 장악하고, [[그워구프|글로가우]](Glogau), [[브리크]](Brieg) 그리고 [[니사 (폴란드)|나이세]](Neisse)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이 전역의 성공으로 프로이센은 인구가 두 배나 늘어났고, 점령한 영토에서 징발된 인부들에게 최소한의 공정한 급료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로 산업 생산성이 증가되었다. 상대적으로 훈련이 덜 된 용병부대가 대다수를 차지하던 다른 나라의 군대들은 점령지의 주민들을 상습적으로 약탈하였고, 주민들을 위협해 겨울을 날 물자를 준비하곤 했으나, 프로이센군은 정예화된 상비군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민족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주입되는 관념이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당대의 독일 민중들이 자기 땅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없다면 누가 통치하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