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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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5년 전역 ==
1745년은 이 전쟁에서 특기할만한 세 개의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전투는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호엔프리드베르크]](Hohenfriedberg), [[케셀스도르프 전투|케셀스도르프]](Kesselsdorf) 그리고 [[퐁트누아 전투|퐁트누아]](Fontenoy)이다. 이 해 가장 처음 일어난 사건은 1745년 1월 8일 [[바르샤바]](Warsaw)에서 맺어진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작센이[[작센]]이 맺은 [[쿼드러플 동맹|사국 동맹]](Quadruple Alliance)이다. 12일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Charles VII)]]가 사망함에 따라 황제 위가 공석이 되고, 새로운 선거가 열리게 되었는데, 바이에른을 계승한 카를 7세의 아들은 이 선거에 후보자로 나서지 않았다. 바이에른군은 또다시 불운에 빠졌는데 분산된 상태로 그들의 겨울 숙영지에서 꿈쩍도 하지 못하다가 차례차례 격파당하고 결국 [[파펜호펜 전투]](Battle of Pfaffenhofen)에서 대패하고 새롭게 즉위한 선제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Maximilian III Joseph)는 다시 한 번 뮌헨(Munich)을 포기해야 했다. 4월 22일 [[퓌센의 화약]](Peace of Füssen)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막시밀리안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프란츠 대공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지원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영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로써 황제군은 사실상(ipso facto) 소멸하였고 프리드리히는 다시금 고립되었다. 프랑스군은 이때 플랑드르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사실 5월 10일 프리드리히가 전장에 나서기 전에 루이 15세와 작센군은 [[투르네]](Tournai)를 공략하고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공|컴벌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이 지휘하는 지원군을 [[퐁트누아 전투|퐁트누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바이에른군은 또 다시 불운에 빠졌는데 분산된 상태로 그들의 겨울 숙영지에서 꿈쩍도 하지 못하다가 차례차례 격파당하고 결국 [[파펜호펜 전투]]에서 대패하고 새롭게 즉위한 선제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다시 한 번 [[뮌헨]]을 포기해야 했다. 4월 22일 〈[[퓌센 화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막시밀리안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프란츠 대공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지원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영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로써 황제군은 사실상 소멸하였고 프리드리히는 다시금 고립되었다. 프랑스군은 이때 플랑드르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사실 5월 10일 프리드리히가 전장에 나서기 전에 루이 15세와 작센군은 [[투르네]]를 공략하고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공|컴벌랜드 공작]]이 지휘하는 지원군을 [[퐁트누아 전투|퐁트누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슐레지엔에서는 습관적인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의 단결력은 큰 전투가 없었음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5월 말 프리드리히는 약 6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글라츠(Glatz)와 나이세(Neisse) 사이에 위치한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에 막사를 쳤다. 한편 [[란데슈트]](Landeshut) 근교의 [[크르코노셰]](Krkonoše) 후방에는 카를 공이 85,000명의 오스트리아와 작센 연합군을 이끌고 있었다. 7월 4일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Battle of Hohenfriedberg), 혹은 슈트리가우(Striegau)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그의 이제까지 경력 중에서, 아니 그의 모든 전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승리이며 이 이상 뛰어난 승전은 [[로이텐 전투|로이텐]](Leuthen)이나 [[로스바흐 전투|로스바흐]](Rossbach)의 승리 외에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카를 공은 완벽한 패배를 겪은 후, 그가 진군해왔던 산을 통해 퇴각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조직적으로 추격을 가했으며 지형이 복잡하고 황폐했기 때문에 그의 적들이 어디까지 궤주하였는지 알지 못했다.
 
슐레지엔에서는 습관적인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의 단결력은 큰 전투가 없었음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5월 말 프리드리히는 약 6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글라츠(Glatz)]][[나이세(Neisse)]] 사이에 위치한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에 막사를 쳤다. 한편 [[란데슈트]](Landeshut) 근교의 [[크르코노셰]](Krkonoše) 후방에는 카를 공이 85,000명의 오스트리아와 작센 연합군을 이끌고 있었다. 7월 4일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Battle of‘호엔프리드베르크 Hohenfriedberg)전투’, 혹은 슈트리가우(Striegau)에서슈트리가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그의 이제까지 경력 중에서, 아니 그의 모든 전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승리이며 이 이상 뛰어난 승전은 [[로이텐 전투|로이텐]](Leuthen)이나 [[로스바흐 전투|로스바흐]](Rossbach)의 승리 외에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카를 공은 완벽한 패배를 겪은 후, 그가 진군해왔던 산을 통해 퇴각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조직적으로 추격을 가했으며 지형이 복잡하고 황폐했기 때문에 그의 적들이 어디까지 궤주하였는지 알지 못했다.
엘베 강 상류에서 양측 사령관의 움직임으로 여름이 다 갔다. 그러는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이 어떻게 될 것인가와 영국과 프로이센간의 이해관계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오스트리아는 황제 선거를 위해 마인과 [[란]](Lahn) 그리고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주시했는데, 이곳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들을 압박하기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펼치고 있었다. 트라운 원수는 선제후들을 압박하는데 성공하였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프란츠 대공은 9월 13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Francis I, Holy Roman Emperor)로 즉위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며칠 후 영국과 함께 선거결과를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에 호소하지 않는 이상 브레슬라우 조약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작센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가담하였다. 카를 공의 새로운 움직임은 [[조르 전투]](Battle of Soor)를 야기하였다.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은 훗날 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결정짓는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프리드리히의 처음 포진은 상당히 위태로웠으나 전진해오는 적군을 앞에 두고 전위를 바꾸었고 이후 치열한 격전을 벌여 9월 30일 눈부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엘베 강 상류에서 양측 사령관의 움직임으로 여름이 다 갔다. 그러는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이 어떻게 될 것인가와 영국과 프로이센간의 이해관계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오스트리아는 황제 선거를 위해 마인과 [[란]](Lahn) 그리고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주시했는데, 이곳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들을 압박하기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펼치고 있었다. 트라운 원수는 선제후들을 압박하는데 성공하였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프란츠 대공은 9월 13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Francis I, Holy Roman Emperor)]]로 즉위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며칠 후 영국과 함께 선거결과를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에 호소하지 않는 이상 브레슬라우 조약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작센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가담하였다. 카를 공의 새로운 움직임은 [[조르 전투]](Battle of Soor)를 야기하였다. 이 전투가 벌어진 곳은 훗날 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결정짓는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프리드리히의 처음 포진은 상당히 위태로웠으나 전진해오는 적군을 앞에 두고 전위를 바꾸었고 이후 치열한 격전을 벌여 9월 30일 눈부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전역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작센 군을 주력으로 오스트리아군 일부가 포함된 군세를 이끄는 야전 원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루토프스키|루토프스키]](Rutowsky 1702–1764)가 작센에서 출진하여 보헤미아에서 출진한 카를 공과 함께 [[베를린]]을 협공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에서부터 서둘러 이동하여 [[드레스덴]](Dresden)에 도착하였고 카톨리슈-헨네르스도르프(Katholisch-Hennersdorf)에서 11월 24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고, 이윽고 [[괴를리츠]](Görlitz)에서 11월 25일 전투가 벌여 적군을 격퇴하였다. 카를 공은 이로 인해 물러나야만 했다.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늙은 데사우]](Old Dessauer) 휘하의 프로이센 2군이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엘베 강을 거슬러 올라 루토프스키를 상대하였다. 루토프스키는 드레스덴과 [[마이센]](Meissen) 사이에 있는 [[케셀스도르프]](Kesselsdorf)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노련한 레오폴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12월 14일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작센 군과 그 동맹군들은 격전 끝에 완벽히 패주하였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포기하였다. 12월 25일 [[드레스덴의 조약]](Peace of Dresden)으로 프리드리히는 선제후의 권한을 인정받았고 브레슬라우 조약으로 얻은 슐레지엔 영유권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전역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작센 군을 주력으로 오스트리아군 일부가 포함된 군세를 이끄는 야전 원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루토프스키|루토프스키]](Rutowsky 1702–1764)가 작센에서 출진하여 보헤미아에서 출진한 카를 공과 함께 [[베를린]]을 협공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에서부터 서둘러 이동하여 [[드레스덴]](Dresden)에 도착하였고 카톨리슈-헨네르스도르프(Katholisch-Hennersdorf)에서헨네르스도르프에서 11월 24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고, 이윽고 [[괴를리츠]](Görlitz)에서 11월 25일 전투가 벌여 적군을 격퇴하였다. 카를 공은 이로 인해 물러나야만 했다.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늙은데사우 데사우영감]](Old Dessauer) 휘하의 프로이센 2군이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엘베 강을 거슬러 올라 루토프스키를 상대하였다. 루토프스키는 드레스덴과 [[마이센]](Meissen) 사이에 있는 [[케셀스도르프]](Kesselsdorf)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노련한 레오폴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12월 14일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작센 군과 그 동맹군들은 격전 끝에 완벽히 패주하였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포기하였다. 12월 25일 [[드레스덴의드레스덴 조약화약]](Peace of Dresden)으로 프리드리히는 선제후의 권한을 인정받았고 〈[[브레슬라우 조약으로조약]]〉으로 얻은 슐레지엔 영유권을 확고히 하였다.
 
== 1741년 - 1747년 이탈리아 전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