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습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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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정은 8.15 해방이 되었을 때의 일을 봐도 알 수 있다. 8.15 당일은 사람들이 대부분 해방이 된 줄도 몰랐고, 시골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시내도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고 한다. 8.15 당일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오는 사진으로 알려진 것들도 실제로는 모두 16일 이후의 사진이라 한다. 심지어는 해방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상당할 정도로 민도도 낮았다.<ref>[http://office.kbs.co.kr/mylovekbs/archives/79870 8.15 광복 특집 : 기억의 재구성 - 1945.8.15] KBS 1TV 2011. 8. 14(일) 밤 8시 방송<br/>[http://www.dailymotion.com/video/xt1nay_8-15-%EA%B4%91%EB%B3%B5-%ED%8A%B9%EC%A7%91-%EA%B8%B0%EC%96%B5%EC%9D%98-%EC%9E%AC%EA%B5%AC%EC%84%B1_school 8.15 광복 특집 : 기억의 재구성] (영상 보기)</ref> 해방과 같은 경천동지할 사건에도 반응이 이랬다면 그보다 8년 전의 고작 보천보 사건 같은 정도는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갔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시절에 호외니 속보니 하는 것이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보천보 사건은 규모가 좀 컸다는 것 외에는 1920~30년대에 만주 무장단체들이 조선국경을 침입하여 벌인 무수히 많았던 약탈 사건들<ref>[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80&docid=0027126862 1920년~1936년간 국경 3도 비적 누년 상황표 (國境三道 匪賊 累年 狀況表)] (대정9년 -소화11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과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862 원문 바로보기])<br/>[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97&docid=0027126469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帝國議會) 설명자료] 昭和12年(1937년) 조선총독부 경찰청 경무국 :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469#6 (원문 바로 보기)] - p.6 : 1932년~1937년 9월 기간 대안비적 선내침입누년표(對岸匪賊 鮮內侵入 累年表) / p.7 : 압록강·두만강 대안 마비적(馬匪賊) 출몰 누년표 (1932~1937.9)</ref> 중의 하나일 뿐이므로 곧 잊혀졌고, 해방당시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이 사건을 신문이 크게 보도하여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면, 그 유명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대다수 신문이 보도했으므로<ref name="news"/> 그가 전사했다는 것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보천보 사건도,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거의 알지 못했다.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운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난 후 자신의 항일투쟁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김일성 본인이 1942년에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자신도 당시는 이 사건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http://218.10.232.41:8080/was40/detail?record=46&channelid=55726&presearchword=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br>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008860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br>
[http://news.joins.com/article/3018979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ref>
 
1935년 2월에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10_1_0026163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일으킨 [[동흥습격사건|동흥(東興) 습격 사건]]은<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4002092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4&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0&publishType=00020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侵入(인민혁명군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동아일보 1935.02.14<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500209102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5&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1&publishType=00010 被襲東興邑(피습동흥읍) 民家(민가) 六十戶(육십호)에서 掠奪(약탈)] 1935.02.15 동아일보 2면<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600209102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6&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2&publishType=00010 被襲(피습)된 東興邑(동흥읍)의 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 拉去十名(납거십명)] 동아일보 1935.02.16<br/>[http://db.history.go.kr/id/npjj_1935_02_16_x0002_0820 즉사 중경상 납거 등, 피해자 23명, 사자 8, 중경상 5, 납거 10명, 동흥 습격사건 後報/ 주민측 피해/ 공산군을 계속 추적 중] 조선중앙일보 1935년 02월 16일 2면</ref><ref>[http://www.i815.or.kr/data2/ganhaeung/thesis/1994/199413.pdf 장세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37~369</ref>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고,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보천보 사건을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지만<ref name="maeil"/><ref name="choi"/>, 오늘날 동흥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문연구자 외에는 거의 없다. 이를 보아도 보천보 사건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질만한지 알 수 있고, 김일성의 중요한 항일투쟁 업적이라는 북한의 대대적 선전 때문에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알려진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 때문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구성원들 수백명까지 검거되어 처벌받는 소위 [[혜산사건]](惠山事件)으로 지하 조직이 궤멸되었다.<ref name="sa"/><ref name="wa"/><ref name="su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