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5번째 줄: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 이토훙커우 히로공원을 부미울린 사살투탄 사건===
{{본문|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파일:KimGu and YoonBongGil.JPG|thumb|left|200px|김구와 윤봉길]]
41번째 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ref name=autogenerated1>[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4300153 donga.com[뉴스&#93;-“숭고한 정신, 모두에게 교훈”…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75주년<!-- 봇이 붙인 제목 -->]</ref>,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도시락은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