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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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과 수학 ===
[[파일: 탁영종택.jpg|thumb|백곡마을에 위치한 탁영종택]]
1464년(세조 10) [[청도군|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포은 정몽주와 교유한 고조 할아버지 김항(金伉)이 [[청도군|청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에서 집의를 지낸 아버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2099&cid=46622&categoryId=46622 김맹(金孟)]의 꿈에 용마(龍馬)를 보고 세 아들을 낳아, 아들의 이름을 모두 마(馬)변이 있는 글자로 지었다고 한다. 큰 아들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40885&cid=51939&categoryId=54684 김준손(金駿孫)]이며, [https://m.search.naver.com/p/crd/rd?m=1&px=198&py=544&sx=198&sy=544&p=To0KIdpVupVsstffloZsssssteR-340139&q=%B1%E8%B1%E2%BC%D5&ssc=tab.m_kdic.all&f=m_kdic&w=m_kdic&s=Visq1/CU8cy+EMhQdU1mng==&time=1519193324220&a=kdc_gnl.terms&r=3&i=08097018_01257eacee48&u=http%3A//terms.naver.com/entry.nhn%3FdocId%3D2640858%26cid%3D51939%26categoryId%3D54683 김기손(金驥孫)]은 둘째이고, 막내아들인 그가 김일손(金馹孫)이다. 효성의 귀감으로 후세에 알려지는 [[김극일]](金克一 1382~1456?)의 손자이다. 어려서 〈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478년]] 15세 [[단양 우씨]]와 혼인하고, 선산의 [[이맹전]]을 찾아 배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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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아버지 김맹(金孟)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첩자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는 사람을 보내어 목을 베어 [[효수]]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그의 가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자손이 끓겼지만 큰 형 김준손(金駿孫)의 차남 김대장(金大壯)이 출계(出系)하여 그의 대(代)를 이었다.
 
[[파일: 자계서원.jpg|thumb|탁영 김일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자계서원]]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경상북도|경북]] [[청도군|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파일: 탁영문집.jpg|thumb|탁영문집 판목]]
 
[[파일: 탁영금.jpg|thumb|탁영이 애용하던 거문고 '탁영금"(보물 제957호)]]
그는 [[거문고]]를 좋아했고 능숙한 연주가였다.
그가 남긴 거문고는 탁영거문고라고 해서 귀중한 유물이다.김일손이 타던 거문고는 [[1490년]]경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옛 선비들이 사용한 악기로는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