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청년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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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적이고 심하게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ref name=autogenerated3 />
 
[[1948년]] [[5월 10일]]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선 6명이 족청을 표방하여 당선되었으며, 나중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1949년]]1948년 11월부터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 단일화하라는 [[이승만]]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청년단체 통합이 추진되어, 족청도 저항 끝에 [[1949년]] 결국 [[대한청년단]]에 흡수, 해체되었다.
 
[[대한청년단]]과의 흡수 과정에서 [[이승만]]의 명령에 단계적인 합류안을 내놓는 등 저항을 하자, 이승만은 48년49년 1월 5일 담화문을 내 족청의 해산을 공식 촉구하였다. 49년 2월1월 20일 족청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이범석은 국방장관에서 해임되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68쪽</ref>
 
그러나, 해산 뒤에도 족청 출신들은 ‘족청계’라고 불리는 세력을 형성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 역대 총선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