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히데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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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히데야스'''({{llang|ja|結城 秀康}})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초기까지의 [[다이묘]]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차남으로 [[에치젠 국|에치젠]](越前) [[후쿠이 번]](福井藩)의 초대 번주이다번주를 지냈다.
 
== 일생 ==
=== 출생 ===
[[157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이에야스]]의 차남으로 [[도토미 국]](遠江国) [[하마마쓰]](浜松)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에야스의 거성인 [[하마마쓰 성]]이 아닌 성 아래의성하 우부미 마을(宇布見村)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미카와 국|미카와]](三河国) 출신으로 신사(神社)의 샤닌(社人)이었던 [[나가미 요시히데]](永見吉英)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측실인 오만노 가타오만노가타(於万の方, 조쇼인長勝院)이다. 오만은 원래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로, 오만이 히데야스를 임신하자 쓰키야마도노의 분노를 두려워한 이에야스가 중신 [[혼다 시게쓰구]](本多重次)에게 보내 아이를 낳게 하였다.<ref>혼다 시게쓰구가 히데야스의 출생과 양육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는 오만의 임신을 알게 된 쓰키야마도노가 격노하여 오만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을 혼다 시게쓰구가 우연히 발견하여 제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는 설, 둘째는 쓰키야마도노의 화를 두려워한 오만이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쳐 오자 혼다 한에몬이 다시 혼다 시게쓰구에게 알려 혼다 시게쓰구가 오만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설, 셋째는 이에야스가 오만에게 혼다 시게쓰구의 집으로 가서 아이를 낳으라고 명령하였으나 오만은 이를 거부하고 친척이자 한때 이에야스의 시녀였던 혼다 한에몬의 백모에게로 가 아이를 낳았다는 설 등이다. 「에치젠 가전(越前家伝)」.</ref> 히데야스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의 후손으로 당시 우부미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나카무라 마사요시]](中村正吉)의 저택에서 태어났는데, 이 때 부친 이에야스가 나카무라 마사요시의 집에 직접 심은 소나무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ref>[http://www.city.hamamatsu.shizuoka.jp/lifeindex/enjoy/culture_art/nakamurake_jutaku/index.htm 하마마쓰시/중요문화재 나카무라가 저택]</ref> 이런 인연을 이유로 [[후쿠이 번]]의 히데야스 후손들은 [[참근교대]] 때마다 나카무라 가문으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또한 히데야스는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ref>나머지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었다고 하나 일설에 따르면 [[나가미 사다치카]](永見貞愛)라는 인물이 바로 이 히데야스의 또다른 쌍둥이 형제라고도 한다. 당대에는 둘 이상을 낳는 것은 짐승들에게나 있는 일이라고 하여 쌍둥이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일각에서는 히데야스가 부친 이에야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히데야스가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바쿠후 부녀 계보(柳営婦女伝系)』 제 1권 속군서류종완성회(続群書類従完成会). </ref>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이다.<ref>일설에 따르면 히데야스가 [[동자개]](빠가사리, 일본어로는 기기ギギ)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ref>
 
=== 불행한 유소년기 ===
어린 오기마루는 이에야스의 미움을 받아 3세때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복형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노부야스]](信康)는 오기마루를 가엾게 여겨 아들로 인정하도록 이에야스를 설득하였다. 노부야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명으로 자결한 후 집안의 후계자가 될 뻔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양자 겸 인질로 보내졌다. 이후 생부와 양부의 이름을 하나씩 물려받은 히데야스(秀康)라는 이름을 얻었다.
 
=== 청소년기 및 요절 ===
[[1587년]] 규슈 정벌에 첫 출진을 한 후 여러가지 전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아들 [[하시바 쓰루마쓰|쓰루마쓰]](鶴松)가 탄생하자 [[유키 하루토모]](結城晴朝)의 양자 겸 조카사위가 되어 11만 1천 석의 다이묘 지위를 물려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67만[[고쿠다카|고쿠]]의 후쿠이(에치젠) 번주에 임명됐으나 [[1607년]] [[매독]]으로 짐작되는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 직계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