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페로 콜론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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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귀족 가문 [[콜론나 가문]]의 일원으로 1452년 [[벨레트리]] (라치오) 인근 [[치비타라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친척이다.
 
그가 군사 지휘관으로서 첫 주목할만 행위는 1484년에 경쟁 가문인 [[오르시니가|오르시니]]와 [[리아리오 가]]의 공격으로부터 [[팔리아노]]에 있는 그들 가문의 성을 방어해낸 것이였다. 몇몇 다른 전투의 공적을 얻은 후,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의 세력에 가담했던 프로스페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산탄델로성]]에 투옥되었다. 한 차례 풀려난 그는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기간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를 했다는 이유로 다시 투옥되었다. 결국에는 1495년에 프로스페로와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의 왕은 교황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로마에 입성했다.
 
[[나폴리 왕국]]에 프랑스가 잠깐의 통치을 하던 동안에 프로스페로는 [[트라에토]] 공작령과 [[포를리]] 백작령을 획득했다. 하지만 샤를이 알프스 너머로 돌아가자, 프로스페로는 나폴리에서 프랑스 부왕을 쫒아내는데 [[페르디난도 2세 디 나폴리|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를 도왔다.
 
상황은 새롭게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의 침공으로 다시 바뀌었다. 나폴리왕 [[페데리코 1세 디 나폴리|나폴리의 페데리코 1세]]가 [[이스키아 섬]]으로 달아나는 동안에 프로스페로와 파브리치오는 왕국을 지키려했다. 그들은 패배를 했고 나폴리의 [[누오보성]]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또한 라치오에 있는 그들의 성들을 차지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마침내 보석금이 지불되어, 두 친척 형제는 나폴리 부왕인 스페인의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휘하로 들어갔다.
 
프로스페로는 나폴리에 대한 스페인의 결정적인 해결책을 가져다준 [[체리뇰라 전투]] (1503년)에서 스페인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한 후에 그는 라치오에 있는 그의 영지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경기병들을 지휘했다.
 
프로스페로는 [[이트리]], [[스페를론가]], [[체카노]], [[손니오]]를 그의 영지로 추가하며, 한때 남부 이탈리아의 가장 큰 봉건 영주가 되었다. 그는 그를 후계자로 삼은 베스파시아노 (Vespasiano)의 딸 코벨라 디 산세베리노 (Covella di Sanseverino)와 혼인했다.
 
{{quote|부인의 변하지 않는 애정에 자신감 있던 프로스페로는 낮은 신분의 사내를 그의 동료로 데려왔는데, 불행히도 그녀는 그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사랑을 그 사내에게 옮겼다. 자신이 파멸의 작가라고 생각한 프로스페로는 이 상황을 Ingenio experior funera digna meo, "나는 내 발명품에 어울리는 죽음을 맞이한다."라는 문구를 가지며, 발명가의 죽음으로 입증한 [[놋쇠 황소]]라고 여겼다.<ref>p.75 in [[Fanny Bury Palliser]], ''Historic Devices, Badges, and War-Cries'', London: Sampson Low, Son & Marston 1870</ref>}}
 
1515년 이탈리아 북동부 빌라프랑카에서 그는 [[마리냐노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프랑수아 1세]]가 알프스를 넘는 동안에 [[교황 레오 10세]]의 군대를 지휘했다. 갑작스럽고 굴욕적인 기습속에서 그와 그의 부관들은 [[피에르 테라일 셍귀니엘 바야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붙잡혀 가면서, 말하길 “프랑스는 내가 늘 가보고 싶어했던 나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교황에게서 복무를 계속하던 그는 1522년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비코카 전투]]).
 
하지만 그의 건강은 나빠졌고 1523년 밀라노에서 사망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