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페로 콜론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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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페로는 나폴리에 대한 스페인의 결정적인 해결책을 가져다준 [[체리뇰라 전투]] (1503년)에서 스페인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한 후에 그는 라치오에 있는 그의 영지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경기병들을 지휘했다.
 
프로스페로는 [[이트리]], [[스페를론가]], [[체카노]], [[손니오손니노]]를 그의 영지로 추가하며, 한때 남부 이탈리아의 가장 큰 봉건 영주가 되었다. 그는 그를 후계자로 삼은 베스파시아노 (Vespasiano)의 딸 코벨라 디 산세베리노 (Covella di Sanseverino)와 혼인했다.
 
{{quote|부인의 변하지 않는 애정에 자신감 있던 프로스페로는 낮은 신분의 사내를 그의 동료로 데려왔는데, 불행히도 그녀는 그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사랑을 그 사내에게 옮겼다. 자신이 파멸의 작가라고 생각한 프로스페로는 이 상황을 Ingenio experior funera digna meo, "나는 내 발명품에 어울리는 죽음을 맞이한다."라는 문구를 가지며, 발명가의 죽음으로 입증한 [[놋쇠 황소]]라고 여겼다.<ref>p.75 in [[Fanny Bury Palliser]], ''Historic Devices, Badges, and War-Cries'', London: Sampson Low, Son & Marston 187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