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치 겐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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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가와치 겐지의 도료(棟梁) 즉 당주에 대해서는 당시 그러한 '도료'의 개념이 존재했는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후세에 창작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최근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가와치 겐지의 도료의 계보란 흔히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미나모토노-[[미나모토노 요시타다]](源義忠)-미나모토노-[[미나모토노 다메요시]](源為義)-[[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로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요시타다 암살 뒤 다메요시가 가와치 겐지의 도료가 되고, [[다이라 씨|헤이시]](平氏)에 의한 겐지 세력 삭감 정책에 따라 불우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오늘날 부정되고 있는데, 우선 지방관으로 임명되지 못한 채 한직에 머물렀던 것은 다메요시 한 사람 뿐이었고 그 주된 이유도 다메요시 자신의 언행에 숱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관위나 관직이 다메요시보다도 높은 겐지도 다섯 명이나 되었고 다메요시의 아들 요시토모도 능력을 인정받아 아버지의 관위를 훨씬 넘었던 점을 근거로 들어 겐지가 헤이시에 비해 의도적으로 탄압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도료의 지위라는 것도 다메요시가 요시이에의 유언으로 가와치의 옛 겐지 저택을 양도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1급 사료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요리노부 이래 대대로 가와치노카미(河内源氏)를 맡아오던 것이 다메요시의 대에서는 덜컥 끊어지게 된 점은 다메요시가 정말 가와치 겐지의 도료였는가 하는 점을 의심하게 하는 근거로 꼽히고 있다.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이후로는 가와치노카미라는 관직이나 가와치 국 내부의 장원(莊園)에 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의도적으로 대규모의 '사료 말살'을 행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