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슈포르 (샤랑트마리팀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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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경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추기경|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창설된 프랑스 왕국 해군은 장비가 빈약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박은 소수에 불과했다. [[루이 14세]]는 샤를 콜베르 드 테론에게 해군 공창을 수용할만한 규모의 ‘피난, 방어, 무기를 조달할 수 있는’ 위치를 대서양 연안에 찾도록 명령했다. 해안을 몇 년 동안 조사한 후, 1665년에 로슈포르가 선정됐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바다에서 20마일 정도 내륙의 샤랑트 강변에 있으며, 해상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주변 습지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육지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가능하며, 산톤쥬는 소금이나 목재 등 자원이 풍부했다.
 
[[루이 14세]]의 명령에 의해 1666년 함선을 수용할 수 있는 군 조병창을 만들기 위해 로슈포르 성의 유적은 파괴되었다. 조병창이 들어서고, 공방과 상점이 생겨났다. 1677년에는 성장하는 인구에 맞추어 샤랑트에서 나무 파이프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왔다. 콜베르 드 테론 지휘 아래 도시는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1688년부터 1710년까지의 미셸 베곤이 감독관을 맡았던 시기는 조선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1692년까지 49척이었던 것이 전체로 약 350척이 되었다).
 
1757년 9월 로슈포르는 [[7년 전쟁]]의 영향으로 영국군에 의한 [[로슈포르 습격]]의 대상이 되었다.
 
왕국에서의 지불은 매우 열악했고, 임금이 체불되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자들이 봉기해서 일을 중단하고 감독관 선박을 둘러싸는 경우도 있었다. 1777년 로슈포르에 감옥이 완성되었다. 이 감옥은 왕국에 있는 툴롱, 브레스트 감옥과 함께 삼대 감옥이 되었다. 이 감옥에 수감된 죄수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1854년에 감옥은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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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도시==
*{{국기그림|UK}} [[영국]] [[버턴어폰트렌트]]
*{{국기그림|ESP}} [[스페인]] [[토레라베가]]
*{{국기그림|GER}} [[독일]] [[파펜부르크]]
 
== 외부 링크 ==
{{Commons category위키공용분류|Rochefort (Charente-Maritime)}}
* [http://www.ville-rochefort.fr/ 로슈포르 (샤랑트마리팀 주)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