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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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후 [[정조]]는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垂恩[[wikt:墓|墓]])<ref>무덤 이름</ref>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垂恩[[wikt:廟|廟]])<ref>사당 이름</ref>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려 국왕의 생부로서 존대했다. 정조는 경모궁안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항상 부친의 사당을 바라보게 하였다<ref>[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rView=no&Dictionary_Id=10000253&query=%B0%E6%B8%F0%B1%C3%C0%C7%B1%CB%C7%E2%BB%E7%B9%DD%C2%F7%B5%B5%BC%B3 경모궁의궤향사반차도설]</ref> 한다. 이어 수덕돈경(綏德敦慶)의 존호를 올리고, [[1784년]] 홍인경지(弘仁景祉)의 추가 존호를 올렸다. [[1789년]] [[10월 7일]]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생전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의 반대와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결국 고종 때 가서야 그는 왕으로 [[추존]]된다.
 
[[1899년]]([[광무 (연호)|광무]] 3년) [[9월 1일]] 고종 황제는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여추대하고 [[11월 13일]] 묘호는 장종(莊宗)이라고 하였다가, [[1901년]] [[10월 17일]] 광무 5년 다시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고 하였다. <ref>고종실록, 1901년, 10월 17일 45책 41권 67장 A면</ref>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무속신앙|무속]]에서도 장조를 왕자신(뒤주대감)으로 모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정조는 사후 생부의 곁에 묻히게 되어 융건릉이 조성된다. 부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저서 [[한중록]]뿐만아니라 실록,사도세자묘지문등 수많은 사료에 의하면 그는 우울증과 의대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고 꽤 많은 인명을 살상했던걸로 알려져 있어 그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