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00범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묘청]]과 [[백수한]]이 대중을 유혹하자 임원후는 묘청과 백수한 등을 처단하여 화의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며 [[인종]]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답이 없었다. 그뒤 [[참지정사]] 판[[공부]]사가 되었다가 [[중서시랑 평장사]]로 승진하였다.<ref>국역 《고려명신전》(2004, 남공철 저, 김동주 역, 성남 문화원 발행) 140페이지</ref>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임원후는 [[김부식]]과 [[중군수]]에 임명되었다가 얼마뒤 도성에 머물러서 왕을 보위하도록 하였다. 그뒤 동덕좌리공신에 책봉되었고 [[개부의동삼사]] [[검교]] [[태부]]직에 올랐고, 판[[병부]]사가 되었다. [[문하시랑]] [[평장사]]에 임명되었을 때 [[최주]]에게 자리를 양보하였으나 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ref>국역 《고려명신전》(2004, 남공철 저, 김동주 역, 성남 문화원 발행) 140페이지</ref>
줄 11 ⟶ 10:
 
외손자 [[의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정안후(定安侯)의 작위를 받았으며 특별히 대우를 받아 조회할 때는 궁전 위에 올라서서 배례하는 특전을 받았는데, 간관들이 그에 대해 지나친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의종에 의해 선충안사좌리동덕[[공신]]에 책봉되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상주국으로 승진 임명되었으며, 작위도 정안후에서 정안공으로 높여졌으며 식읍 2천호와 석실봉 6백호를 받았으며 관할 [[부]]를 설치하여 [[수령부]](壽寧府)를 설치하고 그 부의 속료를 받도록 하였다. 68세로 사망하였다.<ref>국역 《고려명신전》(2004, 남공철 저, 김동주 역, 성남 문화원 발행) 140페이지</ref>
 
 
기상이 크고 도량이 깊었으며 풍채가 장엄하고 우중하였으며 경서와 역사에 통달하였다. 재상이 된 후에도 근검하고 청백하였으며 10년여 동안 부귀를 누렸다. 묘청의 말에 모두 미혹하였으나 임원후 만은 유독 묘청을 배격하여 따르지 않아 앞을 내다보는 능력에 탄복하였다고 한다.<ref>국역 《고려명신전》(2004, 남공철 저, 김동주 역, 성남 문화원 발행) 140~141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