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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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오전 12시, 4.3 사건의 해결을 놓고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진압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경찰의 기강문란을 탓하며 제주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설명과 증거물이 전부 조작이라며 부인하더니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었고 몸싸움이 벌어져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어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ref>김익렬 기고, 1948년 8월 6일, 8월 7일, 8일자 국제신문</ref><ref>김익렬 유고 : 1970년대 작성, 1988년 12월 김익렬 사망 후 발표, 미간행 출판물</ref>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고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투표소가 피습을 당하여 기록을 빼앗기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0일]]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무 효처리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이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후 문상길 중위(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형집행 1호)등 모 [[부사관]] 등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 학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