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브로시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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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교서품 ===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374년]] [[11월 30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적, 도덕적 부흥에 매진했으며 아리우스파의 이단 사상에 반대했다.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가정교사인 심플리치아누스 밑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세계성공회공동체]]의 큰 어른이었던 [[윌리엄 템플]] [[캔터베리 대주교]]에 따르면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는 신념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부유|부유층]]들이 탐욕에서 벗어나 [[사회]]공동체에서 이웃과 소유를 나누는 [[사회선교]]에도 열심이었다.<ref>{{서적 인용|url=http://www.yes24.com/24/goods/3888028?pid=150931|제목=기독시민의 사회적 책임|성=윌리엄 템플 지음,김형식 옮김|이름=|날짜=2010년 05월5월 03일3일|출판사=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확인날짜=}}</ref>, 곧 [[서방 교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민중]]들은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들 매일같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들에게 겸손한 태도로 대하며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특히 당시 문제아였던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를 회개시켜 훗날 위대한 [[성인 (종교)|성인]]이 될 수 있게끔 해주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예찬사)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성경|성서]]를 주석하는 [[설교]]를 듣고는 회심했으며, 그의 어머니 성 [[모니카]]도 "지나친 [[성인]]존중을 우려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성인들의 묘를 참배하지 않는 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기독교사상을 존중했다.
 
암브로시우스는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설득하여 [[서유럽]]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도록 법안을 제정하라고 하였으나, 법안을 제정하기도 전에 전투에서 그라티아누스가 [[마그누스 막시무스]]에 의해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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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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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 외부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