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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의 비인간성: 견황후에게 자결을 명한 것이 미모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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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년]] 아버지의 큰 경쟁 상대였던 [[원소 (후한)|원소]](袁紹)의 세력을 공격하는 데 종군한다. 거기서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 (후한)|원희]](袁熙)의 아내인 [[문소황후|견씨]]를 약탈하여 처로 삼았고, 견씨는 이듬해 [[조예]](曹叡)를 낳는다. [[211년]] 조비는 오관중랑장 겸 부승상으로 오르지만, 조조는 다섯째 아들 [[조식 (조위)|조식]](曹植)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아직도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다. 하지만 조식이 술로 말미암아 조조의 노여움을 사고 총애를 잃자, 마침내 [[217년]] 그의 나이 31살 때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파일:CaoPiPortrait.jpg|thumb섬네일|조비]]
조비는 [[220년]] 정월 조조의 죽음으로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조조의 지위를 승계한 그 해에, 결국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후한 헌제|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후한 헌제|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게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리하여 조비는 황제로 즉위하고,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劉備)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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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후한의 제후]]
[[분류:3세기 중국 사람]]
[[분류:3세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