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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均如, [[923년]] ~ [[973년]])는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은 변(邊)씨이며, 본관은 [[황주 변씨|황주]]이다.
 
== 생애 ==
어머니는 점명(占命). 얼굴이 못생겨서 부모는 그를 거리에 버렸으나 두 까마귀가 날개로 그를 덮는 것을 보고 부모는 회개하여 다시 데려다 길렀다 함. 어릴 때부터 <원만게(圓滿偈)>를 즐겨 읽었고 15세 때 부흥사(復興寺) 식현화상(識賢和尙)에게 학문을 배워 뒤에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순(義順)의 문인으로 수도에 힘썼다. 한편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노력하여, 향가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이 노래 속에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 넣었다. 불교계의 종파 통합에도 힘을 기울여 관혜(觀惠)의 남악파(南岳派)와 희랑(希朗)의 북악파(北岳派)의 통합을 위해 인유(仁裕)와 함께 대찰(大刹)의 승려를 찾아 설득하고 민간을 순회, 설교하여 종파간의 분쟁을 끝내게 했다. 958년(광종 9)에는 시관(試官)이 되어 유능한 승려들을 많이 선발했다. 법계(法階)는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에 이르렀다. 한때 오관산(五冠山) 마하갑사(摩詞岬寺)에 있었으며, 963년(광종 14) 왕이 그를 위해 창건한 귀법사(歸法寺)에서 주지로 있다가 죽었다. 그가 지은 향가 <보현십원가>는 불교 문학의 일대 결정(結晶)으로서 혁련정(赫蓮挺)이 지은 <균여전>에 수록되어 있다.
 
15세 때 중이 된 후 [[부흥사]] 식현 화상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영통사]]에서 수도에 힘쓰는 한편, 불교 보급에 노력하여 〈[[보현십종원생가]]〉(普賢十種願生歌 : 약칭 [[보현십원가]])라는 11수의 [[향가]]를 지었다. 그 노래 속에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 넣음으로써 대중이 불교에 친근하도록 했다.
 
불교계의 종파 통합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남악파와 북악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고려 광종]] 때에는 시관이 되어 유능한 승려들을 많이 선발하였다. [[963년]](광종 14년) 왕이 그를 위해 세워준 [[귀법사]]에서 지내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 《공목장기(孔目章記)》 8권, 《오십요 문답기》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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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황주 변씨]]
[[분류:10세기 한국 사람]]
[[분류:10세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