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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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 시절 ====
[[파일:Cheong Il Hyeong.jpg|thumb섬네일|150px|의붓 동생 [[정일형]]<br />(계모 한은총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소녀기 무렵 찾아온 집안의 가난과 고독은 그를 괴롭혔고, 가난한 살림 탓에 어머니 이말대는 생업을 위해 일을 나가고 그는 학업을 마친 뒤에는 갓난 동생들을 돌보며 지내야 했다. 살림살이는 어머니 일 나간 동안 동생들을 돌보며 저녁을 스스로 준비해야 할 만큼 넉넉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 인주를 비롯해 형제들을 각별히 챙겼지만 형제들은 일찍 죽었다. 또한 그는 계모와 친모를 구분하지 않을 만큼 가족애가 두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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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과 여성잡지 창간 ====
[[파일:March 1st movement.jpg|thumb섬네일|left왼쪽|서울 [[탑골 공원]]에 위치한 3·1 운동 서판]]
{{참고|3ㆍ1운동}}
일본 유학 중 [[3ㆍ1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국내에 잠입, [[1919년]] [[3ㆍ1운동]] 때 김원주는 여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 자기 집 지하실에서 전단을 등사, 배포하다가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영화학교]]에 재학 중, 3ㆍ1운동 1년 후로 이른바 문화정치 시기여서 언론 집회 및 출판에 대한 시책이 완화되자 다시 잡지를 발간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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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필, 사회 활동과 여성 운동 ===
==== 잡지 활동과 이혼 ====
[[파일:1920년 5월 신여자지 잡지 광고.png|썸네일섬네일|180px|오른쪽|[[신여자]]지 [[1920년]] [[5월]]호 발행 광고]]
 
{{참조|신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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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계몽운동과 강연, 논설 활동 ====
[[파일:나혜석 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jpg|썸네일섬네일|180px|오른쪽|[[신여자]]지 1920년 4월호에 실린 나혜석 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1920년]] [[7월]]부터는 오상순, 염상섭, 김억, 황석우, 나혜석 등과 함께 순수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발표했으나, 불온선전을 한다는 이유로 폐허지는 폐간되고 만다. 그해 말, 그는 직접 잡지 창간을 계획하였으나 [[3·1 운동]]의 여파로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1920년]] [[10월]] [[경성부|경성]] YMCA 청년회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이후 각지를 다니며 사회 문제와 여성문제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그는 여자 교육의 필요성, [[참정권]]의 필요성, 여자의 사회 참여, 남자와의 동등한 지위 부여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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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필, 언론 활동 =====
[[파일:Yi Kwang-su 2.JPG|썸네일섬네일|200px|[[이광수]]]]
일엽은 춘원 [[이광수]]가 ‘한국의 일엽이 되라’며 호까지 지어줄 정도로 빼어난 문재(文才)를 갖고 있었다.<ref name="seonmun"/> [[폐허]]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김일엽이라는 이름은 문단 활동을 시작할 무렵 [[이광수]]가 [[히구치 이치요|일본 작가]]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것이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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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사회 활동 =====
[[파일:김일엽 1928.png|썸네일섬네일|오른쪽|180px|김일엽, [[1928년]] 무렵]]
{{참고|조선여자불교청년회|신간회|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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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정조론 주장 =====
[[파일:1926년 자유연애 강연회.png|썸네일섬네일|왼쪽|140px|[[1926년]] [[2월]] 자유연애 대강연회 연단에서]]
 
[[1920년]] 초부터 그는 육체적인 정조 보다 정신적인 정조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924년]] 그는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주장하였다.<ref name="chinjong"/> 또한 여자에게만 정조와 순결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저항하였다. [[1924년]] 신(新)정조론을 주창, 정조에 대해 ‘사랑을 떠나서는 타 일방에서 구할 수 없는 본능적 감정’이라며 결혼 여부가 아니라 [[근대]]적 사랑에서 정조의 존재를 찾았다.<ref name="modernos">[http://news.donga.com/3/all/20031107/7999100/1 <nowiki>[</nowiki>인문사회<nowiki>]</nowiki> '연애의 시대'…"모던뽀이-모던껄 얼마나 진화했나"] 동아일보 2003.11.1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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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연의 상처와 방황 ====
[[파일:김일엽 1929년.PNG|thumb섬네일|200px|김일엽, 1928년 하윤실과 재혼한 직후]]
그 뒤 [[독일]] 유학파 철학박사로, [[부르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한 [[철학]]자이자 불교학자인 [[백성욱]]과 동거하였다. 김일엽의 자서전인 '청춘을 불사르고'에 의하면, 김일엽은 [[백성욱]]을 그가 [[불교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에 만나 친하게 되었으며, 곧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7~8개월에 걸쳐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욱]]은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이 다하였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백성욱]]은 [[불교]]에의 귀의를 결심, 영적인 지도를 결심하여 결국 일엽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편지 한통만을 남긴 뒤, 오랫동안 방황, 고민하다가 [[1930년]] [[금강산]]에 입산, [[승려]]가 되었다. 깊이 사랑했던 [[백성욱]]이 갑자기 떠나버리자 김원주는 극심한 심적 충격을 받았다. [[1928]]년에 쓴 소설 <희생>은 실화 소설로, [[백성욱]]에 대한 눈물과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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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려 생활 ====
[[파일:나혜석-Na Hye-seok.jpg|thumb섬네일|left왼쪽|180px|친구이자 여성운동 동지인 [[나혜석]]]]
 
[[1935년]] [[정조취미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는 깨끗하기를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 성욕을 품는 남자들의 이중적인 성 관점을 비판하던 [[나혜석]]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수덕사]]를 찾아왔을 때 [[불교]] 승려로 출가하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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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 포교, 불교사회 운동 ====
[[파일:Sudeoksa 01.JPG|썸네일섬네일|200px|[[예산군|예산]] [[수덕사]]]]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외부 출입을 줄이고 [[충남]] [[수덕사]]에서 수도와 법문에 전념하다가 [[1960년]]대에 가서야 수필집과 시집을 펴냈다. 그 뒤 [[1961년]]까지 줄곧 [[수덕사]]에 머물며 설법과 포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설법과 포교, 보살들의 시주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사찰 근처의 땅을 개간하고, 밭을 가꾸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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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계몽론 ===
[[파일:1920년 6월 신여자지 잡지 광고.PNG|썸네일섬네일|180px|오른쪽|[[신여자]]지 [[1920년]] [[6월]]호 발행 광고]]
 
그는 여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유로 여자들의 무지함을 들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여자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부여할 것과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언론과 잡지를 통한 여성 계몽도 필요하다 하였다. [[1920년]]부터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여자 교육의 중요성과 여자들의 사회활동 참여 등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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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세기 한국 사람]]
[[분류:개신교도 이탈자]]
[[분류:20세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