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에이사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Huzzlet the bot (토론 | 기여)
잔글 로봇의 도움을 받아 동음이의 처리: 야마구치 현 - 야마구치현 문서로 링크 바꿈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일본어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구마모토 대학 동문; 예쁘게 바꿈
35번째 줄:
사토 에이사쿠는 [[1901년]] [[3월 27일]] [[야마구치현]] [[다부세 정]]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도쿄 제국 대학]]에서 [[독일의 법]]을 수학하였다. [[1923년]] 그는 최상급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였고, 졸업을 앞둔 이듬해 [[철도성]]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오사카]]의 철도 국장, [[1947년]]부터 [[1948년]]까지 [[교통성]]의 부대신을 지냈다.
 
[[파일:The 4th cabinet of Yoshida Shigeru.JPG|thumb섬네일|left왼쪽|[[제4차 요시다 내각]]에서 (3번째 줄 왼쪽에서 2번째가 건설대신 사토)]]
[[1949년]] 자유당원으로서 [[일본 국회]]에 입문하였다.
 
45번째 줄:
 
== 총리 재임 ==
[[파일:Sato and Nixon 1972.png|thumb섬네일|right오른쪽|[[오키나와]]의 귀환을 위하여 [[닉슨]]과 협상한 사토 총리]]
이케다 총리가 건강 악화로 인하여 사임을 한 후, 사토는 그를 총리로서 뒤를 이었다. 그의 정부는 많은 이들보다 더욱 장기간 동안 집권하였다. 그는 번창하는 경제로 인하여 인기 있는 총리였고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루며 결단력 있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64번째 줄:
 
=== 동남아시아와 관계 ===
[[파일:President Ferdinand E. Marcos with Japanese Prime Minister Eisaku Satō.jpg|thumb섬네일|left왼쪽|[[필리핀]] 방문 중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과 함께]]
사토의 임기 중에 일본은 [[1966년]] [[아시아 개발 은행]] 설립에 참가하였고 동남아시아의 경제 개발에 장관급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일은 전쟁 후의 기간에 일본 정부에 의하여 개최된 첫 국제 회의였다. [[1967년]] 그는 [[싱가포르]]를 방문한 첫 일본 총리가 되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남베트남]] 정부의 큰 지지자였다.
 
73번째 줄:
[[1975년]] [[5월 19일]], 식당에 있는 동안에 사토는 [[혼수상태]]의 결과를 가져온 큰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74세의 나이로 [[6월 3일]] 지케이 대학 의료소에서 사망하였다. 장례식 후에 그의 유해는 다부세 정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치되었다.
 
[[파일:Kishi and Sato.jpg|thumb섬네일|180px|right오른쪽|[[기시 노부스케]]와 사토 에이사쿠 형제]]
== 개인 생활 ==
사토는 [[1926년]] 외교관 [[마쓰오카 요스케]]의 딸 마쓰오카 히로코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 - 류타로와 신지를 두었다. [[1969년]] [[아사히 신문]]은 소설가 [[엔도 슈사쿠]]와 인터뷰에서 사토의 아내가 그를 방탕자와 아내를 패는 사람으로 고발하였다고 한다.
102번째 줄:
{{전임후임
|전임자=[[이케다 하야토]]
|임기=[[파일:Emblem of the Prime Minister of Japan.svg|center가운데|x30px]][[1964년]] [[11월 9일]] ~ [[1972년]] [[7월 7일]]
|대수=61·62·63
|직책=[[일본의 역대 총리|일본 내각총리대신]]
137번째 줄:
[[분류: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
[[분류:구마모토 대학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