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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공자'''({{zh|c=孔子|p=Kǒngzǐ|h=쿵쯔}}) 또는 '''공부자'''({{zh|c=孔夫子|p=Kǒngfūzǐ|h=쿵푸쯔}}, {{llang|la|Confucius|콘푸키우스}},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cw}}[[사상가]]{{.cw}}교육자이고<ref name="글로벌-공자">[[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인도의 사상/불교#공자|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인도의 사상 > 불교 > 원시유교 > 공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시인이[[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 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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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세에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부친 숙량흘은 무사였다.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뿐이었다.
 
공자의 [[자 (이름)|자]]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 소년 시절 ===
《[[사기 (역사서)|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징재가 궐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 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 결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536년]]에 혼인하였으며, [[기원전 535년]] 공자 16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 (춘추 전국)(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ref>{{서적 인용|꺾쇠표=예 |제목=공자가어(孔子家語)|저자=왕숙}}</ref>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이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다.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한다. 서른 살에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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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nowiki/>'''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隱者)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 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利]보다는 뜻[義]를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였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않는 사(士)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 정치관 ===